변증법적 정반합의 원리
왕조시대 권력은 왕, 종친, 관료로 삼분된다. 종친과 관료는 늘 양날의 칼이었다. 왕권을 수호하기도 하고 유린하기도 했다. 태종은 종친과 관료를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먼저 고려의 제왕자부를 계승한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를 설치해 종친을 관리했다. 표면적으로는 종친을 예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감시하려는 의도였다. 2차례 왕자의 난을 겪었던 태종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또한 문제가 될 만한 외척과 공신들도 미리 제거했다. 그리고 감히 왕권을 넘보지 않을 충실한 관료들을 발굴하고 양성해서 세종에게 왕위와 함께 넘겨주었다.
하지만 문종에게 왕위를 넘겨야 하는 시점에서 세종의 입장은 좀 달랐다. 아버지와는 달리 안정적인 왕권이 구축된 상태에서 등극했다.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도 없었고, 심지어 적장자였던 양녕으로부터의 세자위 이양도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태종 덕분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화목한 왕실, 정상적인 왕위 승계를 추구했고, 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골육상쟁을 보고 경험하며 자란 그에게는 당위였을 것이다. 다행히 적장자 문종은 훌륭한 품성과 자질을 갖고 태어나주었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형제들과 우애가 돈독한, 동생들을 각별히 챙기는 큰형님이었다.
세종은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가진 적장자가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왕자들을 위시한 종친들이 힘을 모아 보위하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지 모른다. 실제로 1430년 재내제군소를 종친부(宗親府)로 바꾸고 의정부보다 서열을 높여 조선의 최고 관서로 만들었다. 그에 더해 집현전을 통해 유능한 학자 관료들까지 양성한다면 태평성대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세자시절의 문종과 함께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을 국정에 참여시켰다. 태종의 손자, 세종의 아들답게 수양은 문무에 모두 능했고, 안평은 당대에 삼절(三絶)이라 불릴 만큼 시, 서, 화에 뛰어났다. 수양에게는 변방 방어, 훈련 감독 등 군사와 명나라, 여진과의 외교에 대한 역할이 주어졌고, 안평에게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하는 학술·문예 분야가 맡겨졌다.
종친과 관료가 침범할 수 없는 왕권은 강한 왕을 전제로 한다. 태종처럼 말이다. 그리고 세종의 치세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하지만 세종은 태종이 아니었고, 문종도 태종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은 문종에게 든든한 처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첫 번째 며느리 세자빈 김씨는 미신적인 술법을 쓰고,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방중술(房中術)까지 동원했다가 폐위됐고,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봉씨는 폭력적인 성품에 시도 때도 없이 음주를 하고 급기야 소쌍이란 궁녀와의 동성애가 발각되어 또 폐위된다. 마지막으로 훗날의 현덕왕후가 되는 세 번째 며느리 세자빈 권씨는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욕열로 요절한다. 23세였다.
또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양성하고, 구체적 기록이 전하지는 않지만 고명대신에 준하는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을 발탁해 왕위와 함께 문종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문종의 짧은 치세 이후 이어진 단종 대에 이르러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권람, 최항 등 집현전 학자들 중 상당수가 정변을 일으킨 수양에게 동조했고 세조에게 충성했다.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은 단종을 지키지 못했고 계유정난으로 죽는다.
만약 세종과 문종이 선대의 골육상쟁을 재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형제간 우애와 협력 추구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고, 권력의 비정함을 인정하여 수양, 안평 등을 철저하게 정사에서 배제하고 견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세 번의 실패 이후라도 어떻게든 문종에게 든든한 처가를 만들어주고, 또한 단종에게 강력한 외가를 만들어주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사는 변증법적 정반합의 원리를 따른다. 형제간 권력을 다투는 골육상쟁을 벌이고, 그게 싫어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했더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정변을 일으킨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 든든한 처가를 만들었더니, 그 처가가 외척이 되어 왕권을 침해하고 또한 공신을 키웠더니 그들이 왕권을 넘본다.
문종이 타고난 효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문종은 1446년 어머니 소헌왕후 사망 이후 삼년상을 치르고, 바로 뒤이어 1450년 아버지 세종이 사망하자 다시 삼년상을 온전하게 치른다. 삼년상은 약 27개월 동안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일정기간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야 하는 ‘기거 제한’, 4계절 내내 삼베옷(麻衣)을 입어야 하는 ‘의복 제한’, 고기, 술 등을 금지하고 검소한 밥상을 유지하는 ‘음식 절제’, 아침과 저녁에 곡을 올리고 제례를 반복하는 ‘곡 의무’ 등을 이행해야 해 극심한 정식적, 체력적 소모를 동반한다. 부모가 훌륭한 임금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해 키운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6년의 효도에 전력을 다 써버린 셈이다.
게다가 문종은 아주 성실한, 늘 과로하는 군주였다. 세종이 부활시킨 의정부서사제에 입각하여 현안을 처리하고, 경연을 통해 학문을 닦았으며, 자주 접견할 수 없는 신료들은 야대와 윤대를 통해 만났다. 윤대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도 종전의 4품에서 동반 6품, 서반 4품까지 확장했다. 6품은 6조의 좌랑 및 여타 부서의 실무진으로, 장원급제한 신입 관리까지도 포함되는 범위였다.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도 윤대에 들어오는 신료의 범위를 넓혀 더 듣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만큼 문종은 국정에 진심이었다.
특히 문약했다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문종은 군사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지금 중국에 전쟁의 징조가 있어 우리나라도 변방 지키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역대의 일은 사책(史冊)을 상고해 알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원컨대 삼국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적이 내침한 일과 이에 대한 방비책과 이해득실을 상세히 고증하고 채집, 편찬해 널리 볼 수 있도록 하라.” 문종이 1450년 삼국 시대부터 고려까지 중국과 북방 세력의 침입과 전쟁에 대한 내용들을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 편찬을 명하며 한 말이다.
세종 당시 군사제도는 3군을 두고 각 군은 4개의 사(司)로 편성된 반면 진법 체계는 5개의 진을 전, 후, 좌, 우, 중앙에 배치하는 형태여서 3군 12사 체제와는 서로 맞지 않았다. 이에 문종은 진법 체계와 일치된 5사로 개편하고 대다수의 병종을 5사 내로 편입시켰고, 일선 지휘관인 호군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여 각 단위 부대 운용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렇게 개정된 군사의 운용 방식과 훈련 방식을 반영한 진법서인 <어제신진서> 간행도 지시하였다.
또한 중신기전 1백 개 혹은 총통 50발을 연달아 발사할 수 있는 신기전을 탑재한 오늘날의 다연장포에 해당하는 화차를 제작하였고,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과 함께 변방 일선 고을에 실전 배치하였다. 각종 화기 운용에 필수적인 염초의 조달을 위해 전국에 염초도회관도 설치하였다.
그 외에도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발명을 주도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완성하였으며, 제왕학의 교본인 <대학연의> 주석작업도 진행했는데, 2년 2개월에 불과했던 재위 기간으로 인해 그 업적들이 대부분 가려져있지만, 29년 동안의 세자시절부터 정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세종 대의 큰 업적들 대부분에 문종의 열정과 실력이 담겨있다. 문종은 아까운 임금이다. 세상사가 모두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