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기억

by THE RISING SUN

왕의 권위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통성(正統性)이다. 정통성은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 지배를 승인하고 허용하게 하는 논리적·심리적 근거다. 그 정통성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적통성(嫡統性)이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원손(1441~1448)으로 책봉되어 이후 세손(1448~1450), 세자(1450~1452), 왕(1452~1455)을 모두 거친 조선의 유일한 국왕이다. 또한 훗날 상왕이 됐다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노산대군으로 추봉까지 됐으니 왕이 받을 수 있는 칭호는 모두 받은 셈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명분은 다음과 같다. “어리고 나약한 왕의 치세를 틈타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등이 정권을 쥐고 흔들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또한 안평대군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며 역모의 속내를 드러냈는데, 결국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왕을 끌어내리고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하였기에, 내가 어쩔 수없이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제거한 것이다.”


정통성은 명분의 한 종류다.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자는 그 보다 더 강한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명분은 우선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한때 노산군일기였던 단종실록의 필진은 수양대군의 신하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종이 나이에 비해 영민하고 당당한 국왕이었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물론 수렴청정할 내명부의 어른이 없는 11살의 어린 왕이 국정을 처음 대하는 즉위 초에는 의정부와 대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문종이 황보인,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에게 지시한 사항이었고 또한 즉위 교서에 구체적으로 부기된 사실이기도 했다.


선왕의 유지를 받은 의정부의 대신들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였다가, 남지가 병으로 사임한 후 김종서와 정분이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이 된다. 영의정은 사실상의 명예직이었고, 정분은 김종서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으로, 사실상 국정은 김종서가 주도했다. 처음에는 경연에서 관료들이 국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면 단종은 “대신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고, 대신들이 결정을 내린 사안에 대해 관료들이 반발할 때는 “대신들이 이미 결정한 사안이니 바꿀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원칙적으로 이조(吏曹), 병조(兵曹)에서 후보군을 추천하면 왕이 낙점하는 인사 절차에서도, 단종은 의정부의 결정에 따라 후보군 중 한 명의 이름 위에 미리 표시된 노란 점 위에 검은 점을 찍었다. 이렇게 단종의 유약한 모습이 강조된 반면 수양대군에 대한 기록들에서는 왕재(王才)를 부각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단종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장파 관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대들의 뜻을 잘 알겠다. 이미 대신들과 결정한 사안이지만 다시 의논해 보겠다.”고 답하고, 대신들이 구구절절 이유를 대며 결재를 청할 때는 “내 충분히 알아들었소. 내 조금 더 상량해 볼 테니 그만 물러가시오.”하며 단호하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황표정사(黃票政事)도 이내 폐지하고 의정부의 후보군 중에서 왕이 직덥 선택하는 기존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또한 인사발령을 취소하라며 물러서지 않는 간관들은 문종 대의 일을 언급하며 물리쳤고, 지방에 내려가는 수령들에게는 세종처럼 직접 임명장을 주며 선정을 당부했다. 12살의 어린 왕이라고 믿기 힘든 깊음과 무거움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대한 정치적 견제구를 날리기도 했다. 대신들과 손을 잡은 안평대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시기에는, 수양대군은 자신의 야심을 감추기 위해 여러 기만술을 사용했다. 단종을 책봉한 명나라에 감사를 전하는 고명(誥命) 사은사(謝恩使)를 자원했고, 고립무원의 단종에게 든든한 처가를 만들어주는 국혼을 강권했으며, 자신의 충정을 담아 선정을 펼칠 것을 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난 이후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수양대군에게 단종은 “숙부는 과인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으로 하여금 주(周)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주공(周公)이라고도 불렸던 희공은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끝까지 조카를 보좌함으로써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던 인물이다.


김종서, 황보인 등이 자신의 아들들과 사위들을 부당하게 승진시키는 등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수양대군의 반정 명분도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인사에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단종은 문제를 제기하는 신하들에게 “내가 모두 판단해서 결재한 일이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명한다. 여진족을 물리쳐 두만강 육진을 개척하고 단종 보위의 고명을 받은 김종서였다. 반면 안으로 칼과 창을 겨눈 반정의 공을 구국의 공으로 인정받은 세조의 공신들이 고관대작이 되어 대대손손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실에 비춰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더 이상 내세울 정통성은 있을 수 없었다. 애써 만들어낸 구구절절한 명분도 다만 구차할 뿐이다. 태종은 잃어버린 명분을 회복하기 위해 외부의 힘, 명나라의 책봉에 기대야 했다. 신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과 같은 이치다. 적통의 어린 조카를 밀어낸 수양에게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공신 책봉이었다. 정난공신(1453) 43명, 좌익공신(1455) 41명, 좌익원종공신(1455) 2,300명, 적개공신(1467) 45명 등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의리와 수양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후 천지신명께 제를 올리는 회맹제(會盟祭)를 열었다. 성북단 회맹제(1453)와 오공신 회맹제(1456)가 기록으로 전한다. 적통의 피와 정정당당한 명분이 없으니 동물의 피로 의리와 충성을 다짐받아야만 했다. 불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수시로 시험하기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힘으로 정통성을 짓밟고 역모로 정권을 탈취했기에 다른 힘, 다른 역모의 낌새, 배신의 가능성을 늘 살펴야 했다. 인조반정 이후 반정에 동참한 공신들을 감시했던 기찰(譏察)과 같은 이치다. 수양대군은 그 방편으로 술자리를 도입했다. 이미 한명회, 권람과 같은 책사(策士), 양정, 홍달손 같은 장안의 무사(武士)들을 끌어들여 계유정난을 모의할 때부터 애용하던 방식이다. 술의 힘을 빌려 겉으로는 호탕하게 호연지기를 외치면서 동시에 경계심을 무너뜨려 내면의 취중진담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세조실록에는 왕이 신하들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의 ‘설작(設酌)’이라는 표현 등 술자리가 총 467번 언급된다.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언급된 술자리 974회의 거의 반이다. 반면 집현전은 폐지되고 경연(經筵)은 중단된다. 세조 대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정체성, ‘주석(酒席) 정치’다.


<고려사>는 세종의 명에 따라 김종서, 정인지 등이 참여해 문종 원년인 1451년 편찬된 기전체의 관찬사서로, 열전(列傳) 편에 폐행전(嬖幸傳)이 전한다. ‘폐’(嬖)란 사랑한다는 뜻으로,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말이고, ‘행’(幸)은 ‘행’(倖)과 같은 글자로 아첨한다는 뜻인데, 그냥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유난을 떤다는 말이다. 두 글자를 합친 ‘폐행’(嬖幸)은 특별히,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임금의 총애는 출세와 권력을 보장했고, 폐행이 많아질수록 정치는 썩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다.


고려를 망하게 했던 폐행과 권문세족, 태종이 그토록 힘들게 걷어냈던 외척과 권신들, 그런 특권층이 고려가 망한 지 60여 년 만에 다시 탄생한 것이다. 더불어 수많은 부정적 선례들이 생겨났다. 정통성을 가진, 훌륭한 인품과 자질,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세종과 같은 왕이 나타나만 준다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명제는 불과 몇 년을 못 가 깨지고 말았다. 한명회 같은 재주는 있으나 간교한 신하가 용상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선례, 숙부가 힘이 있다면 멀쩡한 조카를 밀어내도 된다는 선례가 생겼다. “수양 숙부는 주공의 길을 택하지 않았구나”라고 했던 단종의 탄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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