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

The Noble's School 3

by THE RISING SUN

적자가 없어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하는 것을 계후(繼後)라 한다. 조선 시대 양자를 들이고자 할 경우에는 예조(禮曹)에 신청서인 소장을 올려 심사를 받은 후 허가증인 예사(禮斜)를 발급받아야 했다. 계후등록(繼後謄錄)은 예조의 계제사(稽制司)가 예사 발급 목록을 연도별로 정리한 책으로, 현재 광해군 10년(1618)부터 철종 13년(1862)까지 10책이 전한다.


계후등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 부인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다시 혼례를 올렸는데, 첫 번째 처(妻)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두 번째 처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다시 첩(妾)을 들였지만 역시 아들을 얻지 못했다. 남자는 집안의 같은 항렬인 6촌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잃어버렸던 첫 번째 아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친자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법은 두 명의 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첫 번째 처는 첩이 됐고, 친자는 서자가 됐다.


생명체인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번식하기 위해 경쟁한다.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것들이 유한하기 때문이고, 더 좋은 것일수록 더 희소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승패와 서열, 차별을 만들고 그것을 영구화하는 것이 신분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고, 노비법, 서얼법 등 양대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노비법과 서얼법의 근간에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있다. 존비, 귀천을 나누는 이분법이다. 특히 서얼법은 서양에도 없고, 성리학이 시작된 중국에도 없는 유별난 법이다.


고려는 혈통 중심, 조선은 종통(宗統) 중심이었다. 1859년에 간행된 <규사(葵史)>는 조선시대 종통을 잇지 못한 서자들에 대한 자료를 모은 책이다. ‘규(葵)’는 해바라기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봐야 하는 서자들의 숙명을 의미한다. <규사>에 조선만의 유별난 적서차별의 연원이 기록되어 있다. 1415년 우부대언 서선(徐選)이 태종에게 서얼을 차별하여 관직에 등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고, 정적이었던 서자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 동생인 세자 이방석을 죽인 후 오른 왕위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했던 태종은 받아들인다. 법제화된 적서 차별은 이런 정치적 배경에, 성리학이라는 사상, 이권을 향유할 그룹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의도 등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자리를 잡아가다가 16세기 이후 깊게 뿌리를 내린다.


경북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는 보물 413호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살았던 곳이다. 이언적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으로 불렸던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 주리론(主理論)을 최초로 주창해 퇴계 이황에게 전한 인물이다. 독락당 안에는 이언적의 유물, 서책 등을 보관한 전각이 있다.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이언적에게 보낸 서찰이 함께 보관되어 있는 어서각(御書閣)이다. 이언적의 후손은 혈통의 옥산파(玉山派)와 종통의 양동파(良洞派)로 나뉘는데, 독락당은 옥산파가 물려받는다. 어서각 현판 밑에는 경상관찰사의 명령인 ‘서책불출문외(書冊不出門外)’가 적혀있다.


이언적은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는데, 이때 아들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이 따라가 아버지를 모신다. 유배지에서 부자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대해 토론하고 정리했으며, 기타 질병과 치료법 등 일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이전인은 훗날 이 기록들을 묶어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을 출간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학문적 성취 외에도 서로를 살뜰히 아끼고 살피며 부자의 정을 쌓는데, 그렇게 7년이 지난 1553년 이언적이 사망한다. 이전인은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경주까지 운구한다. 3개월이 걸렸다. 당시 아들이 아버지를 졌던 2개의 대나무가 지금까지 이언적이 배향된 옥산서원에 전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하나뿐인 친자에게 대를 물려주지 못했다. 이전인이 서자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학문을 기리고 아버지와의 시간을 추억하기 위해 펴낸 <관서문답록>의 출간도 반대에 부딪힌다. 출간자가 서자라는 이유였다. 이언적의 가문은 5촌 조카인 이응인이 양자로 들어와 대를 잇게 된다.


조선은 가문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다. 가문은 제사를 통해 구성원들이 모이고, 결속을 다짐으로써 존속된다. 제사를 모시는 권리를 가지는 자를 승중자(承重子)라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를 잇는 자가 승중자가 되고, 승중자가 모든 권리를 갖는다. 서자는 아들이지만 아들이 아니고,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니다. 어숙권(魚叔權)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서(庶)’는 여럿을 뜻하고, ‘얼(孼)’은 나무를 벤 그루터기에 돋는 싹을 뜻한다. 서에는 벼슬이 없는 사람, 천하다, 제거하다 등의 의미가, 얼에는 재앙, 근심, 천민, 근심, 불효, 사악, 차별대우하다, 패를 끼치다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종통을 잇지는 못했지만, 유업을 이어받고 가문의 정통성을 세우는 진정한 방법은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누명을 씻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학문을 할 때 전념해야 할 8가지 항목을 담은 진수팔규(進修八規)라는 제목의 상소를 올렸지만 임금에게 닿지 못했다. 죄인의 신분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상소를 다시 올렸고 결국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성공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학문을 널리 알린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적서 차별의 구체적 내용들이 규정되어있는데, 재산은 적자를 기준으로 서자에게는 1/7, 얼자에게는 1/10을 상속할 수 있었다. 이전인은 서자였지만 이언적에게 각별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가문 대대로 내려 온 재산은 양자인 이응인에게 물려주었지만, 옥산지역에 내려와 스스로 일군 재산과 독락당은 온전히 이전인에게 주었다. 또한 이전인의 생모인 첩 석씨에게도 노모를 극진히 봉양한 일을 칭찬하며 노비와 전답을 물려준다. 관련 기록이 이언적 분재기(分財記)로 전한다. 이언적의 정실부인 함양 박씨도 유배지까지 따라가 7년 동안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사망 후 시신을 경주까지 직접 지고 온 이전인의 공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양자 이응인의 동의까지 받아 이전인에게 재산을 나눠준다. 역시 함양 박씨 별급입안(別給立案)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성리학의 나라, 종통 중심의 사회에서 서자인 친자 대신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조선의 양반에게 숙명이었고, 특히 성리학자 이언적에게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겠지만, 동시대의 율곡 이이(李珥, 1537~1584)는 다른 선택을 한다. 서자만 둘이었지만 이이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서자로 대를 잇게 한다. 또한 1583년 야진여인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나라의 재정난 타개를 위해 면역(免役), 면천(免賤) 또는 벼슬을 대가로 곡물을 받치게 하는 납속(納粟) 제도 도입을 제안하여 관철시킨다. 덕분에 이전인의 아들 이준은 80석을 내고 벼슬에 나갈 수 있는 허통(許通) 문서인 이준예조급첩(李浚禮曹給帖)을 받는다. 선조 32년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고 1610년엔 통정대부 청도군수가 된다. 이후 이준의 후손들도 대대손손 출사의 기회를 얻는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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