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ble's School 4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하늘은 재주를 고르게 주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 제한하니 인재가 늘 모자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진 이를 버리고, 개가했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만이 천한 어미를 가진 자손이나 두 번 시집간 자의 자손을 벼슬길에 끼지 못하게 한다.”
허균(許筠, 1569~1618)이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유재론(遺才論)>에서 한 이야기다. 재주를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의 총체라 한다면, 재주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선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졌다. 부모, 지능, 신체, 재력 같은 것들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후회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제일 행복한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영원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내 의지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했다. 신분이다. 천민이나 평민은 차라리 포기가 쉽지만, 반은 양반의 피인 서얼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특히 허균이 말했던 그 재주가 특출한 이들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서자 중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있다. 서자임에도 병조판서, 한성판윤,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삼정승과 동렬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랐고, 무령군(武靈君)이라는 군호까지 받았다. 분명 뛰어난 재주를 가진 덕분이었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자광은 조선시대 제일의 간신(奸臣)이다. 서자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유자광의 집안은 조선 초기 현달한 가문이었다. 할아버지 유두명(柳斗明)은 정3품 대언을 지냈고, 아버지는 음직으로 출사하여 종2품 경주부윤을 지냈다. 유자광은 서자였지만 집안의 배경으로 왕의 호위와 궁궐 수비를 담당하는 갑사(甲士)가 됐다. 갑사는 주로 지배계층 자제들 중에서 뽑았는데, 무과와 달리 병법이 아닌 무예 실력만을 검증하였고, 근무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도 받을 수 있었다.
세조 13년인 1467년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다. 유자광은 일개 갑사에 불과했지만 난을 진압할 방책과 함께 공을 세울 기회를 달라는 내용을 담은 호방한 상소를 올렸다. 상소로 세조의 마음을 얻은 유자광은 세조 앞에서 직접 무용을 선보이기까지 하고 이후 이시애의 난 진압과 건주여진 이만주 토벌전에 잇달아 참전하여 공을 세운다.
세조는 유자광을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한다. 정랑은 육조의 실무를 관장하는 청요직(淸要職)이다. 대간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던바 ‘서얼이 육조의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에서 시작됐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또한 이듬해엔 별시문과를 열어 유자광이 치르도록 한다. 그리고 당초 낙방이었던 것을 세조가 시험지를 가져오게 하여 장원으로 올린다. 그 해에 정3품 병조참지에 임명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한다. 서른도 안 된 서얼 출신의 갑사가 채 1년도 안되어 병조참지가 된 상황에 대해 대간들이 반발하자 세조는 “너희들이 유자광 발끝이라도 따라가느냐? 나는 절세의 인재를 얻었다.”고 화를 내며 물리쳤다고 한다.
불합리한 서얼법을 무시하고 오직 실력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다면 이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유자광은 허준(許浚, 1539~1615)과는 다르다. 허준은 불굴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으로 어의(御醫)가 되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자신의 의술과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집대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남겼다.
세조가 유자광을 총애하여 등용하고, 왕명으로 문과에 장원급제를 시켰으며,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게 한 사실도 심상치는 않다. 아마도 정통성을 갖지 못한 세조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을지.
그러나 유자광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가 아님은 스스로 드러낸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