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없는 공장, 보이지 않는 무역, 민간 외교
지금 시간과 자금의 제약이 없다면 어디로 떠나고 싶은가. 먼저 세계 건축수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날 것이다. 다음은 중남미 코스타리카다. 1990년대부터 생태복원과 보존을 시작한 에코투어리즘의 시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그 다음은 동남아 미식 천국인 태국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파인 다이닝부터 저렴하지만 맛있는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방콕으로 우선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 테마파크인 미국 플로리다의 매직 킹덤(Walt Disney World),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트래킹으로 불리는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이다. 목적지는 다를 수 있지만, 다들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이 있는 곳을 선택할 것이다. 안전하고 깨끗하고 친절하면 더 좋다.
관광을 ‘굴뚝 없는 공장’이라고 한다. 또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보이지 않는 무역’이라고도 한다.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없이 고용을 창출하고, 내수시장을 진작시킬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외국인 관광객 1명이 쓰는 돈은 반도체 96개를 수출한 것과 맞먹고, 외국인 5명을 유치하면 중형 승용차 1대를 수출한 것과 같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관광은 ‘민간 외교’다. 국제 친선, 문화 교류, 국위 선양 등. 더욱이 관광은 지방 소멸을 막는 탁월한 처방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관광산업, 관광정책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이유다.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은 2019년 역대 최고인 1750만 명을 달성한 후 아직 갱신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세계 관광 대국들은 코로나 종식 이후 보복 관광 수요가 폭발하면서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2024년 스페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9400만 명으로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관광객은 12%, 관광수입은 16% 증가했다. 태국은 전년 대비 26.3% 증가한 3554만 명이 방문했고, 관광수입은 34% 늘었다. 중국은 비자면제 적용 프로그램 적용 확대로 전년 대비 82.9%가 증가한 6488만 명이 방문했다.
특히 일본은 2024년 한국의 두 배에 달하는 3680만 명을 달성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도쿄는 2배, 오사카는 1.5배 늘었다. 2030년 목표치는 6000만 명이다. 그런데 2013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1218만 명으로 1036만 명인 일본을 앞서고 있었다.
일본은 관광산업에서도 한국의 라이벌이다. 최근 한국관광공사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54.3%가 비교대상 국가로 일본을 지목했다. 또한 39.7%가 일본을 함께 방문했다고 답했다. 한국이나 일본 가운데 한 나라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제로섬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2014년 일본에 역전당한 이후 2024년에는 2배로 차이로 밀렸다. 또한 119개 국가를 대상으로 평가한 세계경제포럼(WEF)의 2024년 관광경쟁력지수에서도 일본(세계 3위), 중국(8위), 싱가포르(13위)에 이어 아시아권 4위(14위)를 기록했다.
한국과 일본은 여행수지에서도 비교된다. 우리나라는 2000년 이후 24년 연속 적자이고 2024년에는 125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반면 만년 적자였던 일본은 집계 이후 53년 만인 2015년에 흑자로 전환한 이후 9년 연속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2024년엔 역대 최대치인 396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더군다나 그 흑자에 대한 기여도 1위는 한국이다. 일본을 찾은 관광객 1위는 한국인으로, 전체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
한국을 역전한 10여 년 전, 이후 격차를 2배로 벌리고 3배를 목전에 두기까지, 그간 일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0여 년 전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인터뷰가 최근 한 언론에 실렸다. 그는 “2012년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수는 840만 명인 반면 한국은 1000만 명을 넘었다. 일본은 역사, 전통, 문화가 이토록 풍부한데 왜 이웃나라에 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정책을 바꾼 기본 생각이 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관광정책은 내국인의 해외여행 관리에 중점을 뒀고, 국내 관광산업도 외국인보다는 직장인 단체여행과 연금 생활자 등 내국인 유치에 집중했다.
일본이 외국인 관광객 적극 유치로 관광정책을 전환한 건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자신의 첫 시정연설(施政演說)에서 ‘관광입국(觀光立國)’을 천명하면서부터다. 그리고 2013년, 스가 당시 관방장관의 주도로 90일 무비자 입국 허용 국가 확대 정책이 시행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무비자 입국 확대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이 데이비드 앳킨슨(David Atkinson)이라고 밝혔다.
데이비드 앳킨슨은 현재 일본 문화재 보수 전문 회사 고니시 미술공예사 대표다. 1965년 영국 출생으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일본학을 전공한 후 앤더슨 컨설팅과 살로몬 브라더스를 거쳐 1990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92년 골드만삭스에 입사하여 일본의 불량채권 실태를 파헤치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덕분에 2006년부터 골드만삭스의 파트너로 일했다. 일본 전통문화에 조예가 깊어 일본 정부 관광국 특별 고문을 겸하고 있다.
데이비드 앳킨슨은 저서 <신관광입국론>에서 “일본은 시골이 기후, 자연, 문화, 식사의 4대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 전국 구석구석까지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썼다. 관광정책의 타깃이 되는 외국인, 그것도 전문성을 가진 수요자의 관점에서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안을 내놓았다. “일본에 단 하나 부족한 것은 무비자 입국이다.”
때마침 2013년 도쿄가 2020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외국인 관광객 유치 필요성은 더 커졌고, 일본은 90일 무비자 입국 허용 국가를 확대했던 것이다. 당시 법무성과 경찰청은 치안 악화를 우려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는데, 그럴 정도로 일본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무관심했다. 무비자 확대로 일본은 단숨에 한국을 따라잡았다. 관광예산을 100억 엔에서 680억 엔으로 늘리는 동안 외국인 관광객이 쓴 돈은 1조 엔에서 4조 8000억 엔으로 증가했다. 580억 엔을 써서 3조 8000억 엔을 벌어들인 것이다. 정책을 바꾸고 보니 일본은 이미 외국인을 위한 최고의 관광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바로 인프라다. 사적지(史跡地) 등 전국에 분포된 관광지를 찾는 내국인 여행자나 연금 생활자를 위해 산 좋고 물 좋은 곳마다 지어놓은 숙박시설, 식당가, 골프장, 대형 온천, 그리고 이들을 편하게 연결하기 위해 건설했던 공항, 철도, 도로가 그대로 외국인 관광용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한 예로 후카우라의 후로후시(不老不死) 온천은 동해를 바라보는 바닷가 노천탕으로 유명하지만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서도 외딴마을이라는 입지가 장애물이었다. 그런데도 이 온천에는 한국, 중국 등 인접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40분이면 아오모리공항을 오갈 수 있는 셔틀버스 덕분이다. 지역성(Regionality)은 분명 단점일 수 있지만 인프라를 통해 최고의 상품으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시골은 오래된 낙후(落後), 멀리 떨어진 궁벽(落後)이지만, 뒤집으면 그건 고유성(Uniqueness)이 된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규슈만 하더라도 후쿠오카, 나가사키, 가고시마, 사가, 구마모토 등 6개 공항을 통해 전 지역을 1시간 안에 갈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단 3시간 만에 서울에서 벗어나 한적한 일본의 시골에서 골프를 즐기고, 노천탕에 몸을 담글 수 있다. 이런 인프라 덕분에 2019년 기준 외국인 관광객을 10만 명 이상 유치한 광역자치단체가 47개 중 42개였고, 100만 명 이상은 13개였다. 특히 도쿄, 오사카, 지바는 1000만 명을 넘겼다.
반면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한 지역은 서울(80.3%), 경기(13.3%) 등 수도권이 거의 전부다. 전남, 광주, 충북, 세종은 1%를 밑돈다. ‘지방자치제도’에서 밝혔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처한 ‘낙후’, ‘궁벽’이 광광산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중앙집중화, 아무런 전략도 없는, 단지 다음 선거 홍보물에 치적 한 줄 늘리기 위한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예산 폭탄, 그리고 애물단지, 골칫덩이로의 전락이다. 전국에 출렁다리만 238개를 만들어 놓고, 케이블카는 곧 50개를 돌파할 예정이다. 최근엔 순천만국가정원이 히트를 친 이후 전국에서 정원을 만든다고 다들 부산을 떨고 있다. 어떠한 지역성, 고유성, 상품성도 없는 정책이랄 수도 없는, 그저 주인 없는 눈먼 돈 허공에 뿌리기다.
2014년 한국을 역전하기 전에도 일본은 관광대국이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명치유신 전까지 수백 개의 영주국(領主國)으로 구성되어 있던 일본은 지방의 독립성과 자치성이 잘 보존됐고, 이는 고유한 지역성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일본은 우동집을 가업 삼아 수백 년을 이어가고, 목조 전통가옥 교마치야(京町屋)를 유지보수해 가며 역시 수백 년 지키는 나라다. 보다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고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간다. 이런 성향이 일본만의 고유한 지역성을 극대화시켰고, 공항, 철도, 도로 같은 인프라가 깔리면서 접근성까지 확보된 상황이었다. 다만 일본이 내재한 일단(一端)의 폐쇄성이 외국인 관광객 적극 유치 정책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것이, 한 정치 지도자의 혜안, 실무 참모의 이행력, 일본을 잘 아는 한 외국인 전문가의 탁견, 그리고 올림픽 유치라는 타이밍까지 맞아떨어지면서, 드디어 날카로운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된 것이다. 저출산, 인구감소, 지방소멸 등으로 우리와 똑같은 국가적 위기에 봉착해 있던 일본, 더욱이 인구 증가기 지방 전역에 지었던 숙박시설, 식당가 등 관광시설과 이를 연결하기 위해 깔아 두었던 교통 인프라들이 골칫덩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던 상황에서, 관광입국은 그 모든 문제들을 한방에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됐다. 2013년 1000만 명을 돌파한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은 2019년 3000만 명을 돌파했고, 2030년 60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래된 것을 잘 보존하고 끝까지 이어가는 일본의 성향을 감안할 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관광산업의 상품성은 증대될 것이다. ‘경쟁력’에서 밝혔던, ‘누구나 원하는 것을 나만 가지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더 커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머지않은 시기에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고, 언젠가는 스페인 등을 뛰어넘어 세계 관광대국 1위에도 오를 것이다.
우리 경제가 반도체, 휴대전화, 가전, 제철 등에서 일본을 역전하며 세계 10위권으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갈 때, 우리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얘기했었다. 한 때 뉴욕의 록펠러 센터, 콜롬비아 영화사 등 미국의 상징들을 사들이며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던 일본이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러던 일본이 오랜 침체의 늪에 빠졌고, 저출산, 고령화, 지방소멸이 뒤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설마 우리도”라는 우려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혁신, 신성장 동력 발굴 등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경고음을 울렸지만 “에이 우리는 아니겠지”로 끝나버렸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 똑같이 저출산, 고령화, 지방소멸 같은 문제에 맞닥뜨렸지만, 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일본은 다행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 관광 콘텐츠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기회를 만나자마자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는지 서둘러 찾아야 한다. 지금 출렁다리 만들고, 케이블카 설치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