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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는 이유

진짜 정치를 찾아서 2

by THE RISING SUN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다.”는 말이 세상을 풍미했었다. 지방자치가 부활하고 선출직 단체장, 지방의원들의 자리가 생기면서 권력의 분산이 일어나기 전, 우리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특권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게 하기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 국회의원 등 공직을 두루 경험했다는 정치 9단으로 불리는 한 정치인은 “보람 있는 건 대통령 비서실장, 매력은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지역에서 유지 대접을 받는 자산가가 국회의원에 도전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일, 기업인, 예술인, 교수, 판사, 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명성을 잃고 체면까지 상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그럼 왜 다들 국회의원이 되려고 할까. 좀 더 나가서 왜 다들 정치인이 되려고 할까. 여기서는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인은 제외하겠다. 어차피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오랜 군주정, 신분제의 잔상이 남아있는 거 같다. 대통령은 왕이고, 그 아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벼슬아치이자 귀족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려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군주정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에, 직업은 사실상 과거를 통해 진출할 수 있었던 관리 하나뿐이었다. 보수라는 걸 지급받는 것도 국가의 녹봉을 받는 관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민간에 속해 있는 의사, 화가, 통역사, 요리사, 과학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오른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나랏일을 하고 나랏밥을 먹는 거였다. 실제로 신분에 가로막혀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관리를 꿈꿨다. 양반은 누구나 유생이 되어 문과나 무과를 준비했고, 중인은 잡과를 준비했다. 나머지 농업, 공업, 상업에의 종사는 먹고살기 위한 생업이었지 직업이라 할 수 없었다. 만석꾼 집안의 머슴이나 포구 여각의 일꾼들은 노동의 대가로 새경을 받았지만 역시 생업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관리가 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과의 경우 전국의 수험생이 수만 명인데 3년에 한 번씩 33명만 뽑았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관직의 수는 문관 1779개, 무관 3826개로 총 5605개였다. 거기서 더 좁혀진다. 관직에는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이 있었는데, 정직은 정상적으로 녹봉을 받는 정규직이고 체아직은 일정 기간 근무하다가 교체되는 비정규직이다. 체 아직은 하나의 자리에 여럿이 교대로 근무하는 순환보직으로 녹봉은 근무하는 동안에만 지급됐다. 모자라는 관직을 여러 명에게 나눠 주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문관의 경우 체 아직 105개와 녹봉이 지급되지 않는 무록관(無祿官) 95개를 제외하면 정직은 1579개뿐이었다. 또한 중앙에 근무하는 경관직(京官職)과 지방에 근무하는 외관직(外官職)으로도 나뉘었는데, 결과적으로 문관 정규직이면서 중앙에서 근무하는 경관직 541개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이 541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관리는 모든 백성들의 궁극적 지향점이었고, 특히 문관이 된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안, 지역에 대한 모든 평가가 과거 합격자를 얼마나 배출했는지, 어떤 관리들을 배출했는지에 집중됐다.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서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 그 군자의 현신(現身)이랄 수 있는 관리가 되고자 하는 건 모든 양반의 의무인데,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대안으로 운영했던 게 소과(小科)였다.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됐고 지역사회에서 유학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체아직을 만들고 소과를 운영해야 할 만큼 누구나 갖고자 하는 자리, 그게 벼슬이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라는 인식의 뿌리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여 일가를 이룬 이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정치에 발을 들이고자 한다. 공천을 받으려 하고 장관이 되려고 한다. 그건 자본주의의 총아인 돈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걸 다 이룬 이들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도박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다 무너뜨릴 위험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도전하게 만드는 강렬한 유혹이다. 그리고 “정치는 마약과 같다.”는 말도 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인에 대한 지향성은 유별나다.


그토록 갖고 싶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가지려는 자는 넘쳐나다 보니 경쟁은 불가피하다. 처음에 제외했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가를 다시 모셔오고,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쥐고 싶은 정치꾼도 불러서 전자를 정의, 후자를 불의라 해보자. 싸움이 일어나면 정의는 원칙을 고수한다. 정도를 지키면서 싸운다. 그러나 불의에게 원칙이나 정도 따위는 없다. 어떻게든 쟁취해야 할 목표만 있을 뿐이다. 홀로 주먹을 고수하는 진정한 건달은 칼을 쓰며 때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조선시대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를 치르고 정계에 나갔으나, 오직 권력에 몰두하여 칼을 휘두르고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정적을 만나면 사화에 목숨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낙향하여 학문을 하고 후학을 기르거나, 그도 안 되면 음풍농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반칙을 쓰는 적을 이길 수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정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을 만큼 뿌리가 깊고 단단한, “정치는 몇 개 되지 않는 극히 희소한 권력의 자리에 내가 앉는 일이다. 그 권좌만 차지할 수 있으면 재물도 명예도, 다른 것들은 줄줄이 딸려온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번 가져보고 싶다.”는 정치에 대한 그 불의한 인식 말이다. 오늘의 정치가 더 이상은 먼 옛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왕이나 고관대작들의 권좌가 돼서는 안 된다. 심지어 그때도 권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만 사용하던 왕과 관리들이 있었고 말이다.


정치에서 목적이 되어야 할 국가와 국민은 사라져 버리고 수단일 뿐인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정치는 거래의 대상이 됐다.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매관매직이다. 또한 무겁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해야 할 정치가 거래의 대상이 되다 보니 가벼워지다 못해 땅바닥에 떨어졌다. 온갖 흥정과 상술이 활개치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난무하는 정치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권력은 더 이상 정치의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롯이 수단이어야만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수단.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에서, 국회의원은 봉사하는 자리다. 심지어 지방의원은 무보수다. 그들은 순수하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이고, 유일한 대가는 스스로의 성취와 보람이다. 마치 평생을 아껴서 모은 재산의 일부를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들과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그 자리는 자신의 인생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거나 자랑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은 지극히 실질적이고 소박하다. 권력이라 할 수도 없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이제는 우리도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가 다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는 이용되지 않도록,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수단으로만 쓰이도록 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봉사하려는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그런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한두 번이고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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