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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세계의 지도자를 찾아서 2

by THE RISING SUN

2024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89,372달러다. 룩셈부르크, 스위스, 아일랜드에 이은 세계 4위다. 싱가포르는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1965년에는 정치적, 인종적 갈등을 야기하던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사실상 축출인 분리 독립을 당했다. 1인당 GDP가 국가 경제 전반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20위인 영국은 52,423달러, 36위인 일본은 32,859달러, 71위인 말레이시아는 13,140달러로 각각 싱가포르의 59%, 37%, 15%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30위인 36,123달러로 싱가포르의 40% 수준이다.


지금의 싱가포르를 있게 한 인물은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1923~2015)다.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간 8차에 걸쳐 내각을 이끌면서 장기 집권했고, 총리직 퇴임 이후에도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서기장, 내각의 선임장관과 고문장관 등을 잇달아 역임하면서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리 재임기간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강력한 통치를 시행했다. 이제 막 식민지에서 벗어난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 강대국들 사이에 낀 작은 섬나라, 그리고 중국계 74.3%, 말레이계 13.3%, 인도계 9.1%, 기타 3.3%의 민족 구성, 불교 31.1%, 기독교 18.9%, 이슬람 15.6%, 도교 8.8%, 무종교 및 기타 25.6%의 종교 분포로 대립과 분열, 갈등과 분쟁의 조건을 모두 갖춘 복잡한 나라를, 그는 동남아시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었고,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실용주의’, ‘인종, 언어, 종교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국가시스템’을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제시했다.


리콴유에 대해 싱가포르 내부에서는 절대적 지지를 하고 있으나, 외부에는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언론통제와 검열 등 사회탄압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그러나 그는 철권을 휘두르던 재임기간 그 어떤 사리사욕도 챙기지 않았고, 그 어떤 부패의 기록도 남기지도 않았다. 그는 평생을 검소하게 청렴하게 살았고, 사후에는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허물 것을 지시했으며, 묘지를 만들어 비좁은 영토를 낭비할 수 없다며 자신의 유해를 화장할 것을 지시했다.


그의 주요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최고의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 1965년 독립 당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도시국가로 영토는 좁고 인구도 적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고, 생존을 위해 말레이시아연방에 합류했으나 힘이 없어 사실상 축출되다시피 분리된 직후였다. 그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1972년 기준 예산의 38%를 국방비로 투입해 서양의 최신 무기와 군사 장비를 도입했으며, 중동의 이슬람국가들 틈바구니에서 강력한 국방력을 키워낸 이스라엘 장교단을 유치해 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외교로 안보를 확보하는 외교적 동맹 전략을 수립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과 협력하고 다국적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싱가포르군을 단기간에 동남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 훌륭한 치안으로도 유명한 싱가포르는, 호주의 경제·평화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평화지수’에서 163개국 중 5위를 차지했다. 평가는 군사적 준비태세와 무기 사용정도인 ‘군수화 수준’, 범죄율, 폭력적 사건, 정치적 불안 등 ‘사회적 안정성’, 다른 국가들과의 전쟁 및 분쟁 상황인 ‘국제적 갈등’, 정부의 효율성과 부패 수준인 ‘정치적 안정성’ 등을 세부 지표로 하여 실시된다. 한국은 46위다.


둘째 리콴유는 새로운 교육정책을 도입해 싱가포르를 인재강국으로 만들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주관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싱가포르는 세계 1위다. 땅이 좁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유일한 희망은 인재라고 믿었던 그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분야에 중점을 두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재를 집중적으로 양성했다. 또한 그는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는 원칙을 도입해 싱가포르인 특유의 교육열에 불을 붙였다. 1957년 52%였던 문해율은 1990년 90%까지 올라갔고, 싱가포르를 오늘날 세계 최고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핵심 동력이 된 고급 인력들이 육성됐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 대학이자 세계적인 명문대학이다. 지금 세계의 인재들이 싱가포르로 모이고 있고, 싱가포르의 인재들은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셋째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세계 최고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세계적 싱크탱크인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대학원)가 ‘한 국가의 경제 성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능력을 따지는 상대적 지표’로 조사해 발표한 국가경쟁력지수에서 67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20위였다. 1960년 7.1억 달러 미만이던 싱가포르의 GDP는, 1990년 361.4억 달러가 되면서 30년 만에 51배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북쪽에 조호르 해협, 남쪽에 말라카 해협을 둔 말레이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품을 되파는 가공무역, 국가 간 기업 간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친기업적 환경을 구축해 해외기업들을 적극 유치하는 등 금융업의 허브로 만들었다. 최근 전 세계 300개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아시아 본부의 입지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싱가포르 32.7%, 홍콩 13%, 일본 10.7%, 한국 3.3%가 나왔다. 또한 관광경쟁력지수 평가에서 119개국 중 13위를 차지한 관광대국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부동산 국유화 정책을 추진해 주택을 임대로 공급함으로써 국민들의 주거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현재 9만 달러가 넘는 1인당 개인소득에도 불구하고 3~4억 정도면 신혼부부가 집을 마련할 수 있다.


넷째 리콴유는 싱가포르 정부의 청렴도와 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I)가 18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에서 정치인과 공직자가 청렴한 나라 3위에 올랐다. 한국은 30위였다. 그는 유능한 공직자를 유치하여 최고의 대우를 해주되 비리를 저지를 경우 엄단했다. 독립적 반부패기구인 탐오조사국(CPIB)를 설립해 자신의 최측근까지도 처단하는 엄격한 기준을 유지했고, 공정하고 청렴한 문화는 공공부문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까지 확산됐다. 공직자의 보수는 최대 우리나라의 10배에 이를 정도로 파격적인데, 각 부처별로 학교 성적, 경력, 적성, 면접 등을 통해 후보자를 선발하고 1년 수습기간 동안 인성, 역량 등을 검증한 후 최종 임용한다. 정부는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공직 후보자로 양성하기도 한다.


다섯째 리콴유는 다민족·다종교의 비좁은 섬나라를 화합과 단결의 강소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도시 국가에 불과했다.”고 썼다. 그는 스스로 중국인임에도 어떤 인종적, 종교적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융화를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또한 강력한 정책으로 주거,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인종, 종교와 무관하게 국민이 화합하도록 했고, 여성의 인권 증진과 사회 진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영어 공용화는 “가진 게 없는 나라의 특성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의 인재를 데려오든지 외국의 기업을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국민 통합을 넘어 세계적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세계 화교들의 네트워크 강화와 경제적 이익 증진을 위한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를 주창해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화교 경제인 대회로 만들었는데, 단지 싱가포르인임을 강조했던 그였지만,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중국계라는 자산을 적극 활용하며 실리, 실용의 면모를 드러냈다.


리콴유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주목할 만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부유한 중국인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났고, 싱가포르 최고 명문인 래플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해 차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1946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 입학했다가 1947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Double Starred First Class Honours로, 중간 성적, 최종 성적이 모두 특출하게 최우등이라는 뜻이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당대 세계 최고의 선진국에서의 상류층의 삶을 뒤로 하고,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과 관련된 소송 사건들을 수임하며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발로 뛰며 일궈낸 합의와 중재의 소송 성과들이 쌓여갔고,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싱가포르 내에서는 물론이고 말레이시아까지 알려졌으며 영국 식민당국도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 국가’의 정치 지도자였던 리콴유는, 항상 경계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다양성, 포용성, 실용성을 추구했다. 그것은 리콴유 개인의 특성이고 싱가포르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뿌리 깊은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며 그 가치를 인정하는 역사가 되었다.


리콴유는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표했으며, 특히 우리 국민들의 정신을 높게 평가했다. “식민시절 한국은 강압적 통치를 받았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한국인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또한 제국주의 시절에는 상당히 드물었던 현상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대부분의 피식민지 국가들이 식민주의에 순응하였으나 유독 한국만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다.”


리콴유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는 먼저 부유한 가계,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최고의 학력과 커리어로 누구나 바라는 사회적 성공을 손쉽게 이룰 수 있었음에도, 그런 개인적, 사익적, 물질적 추구를 뒤로 하고, 국가적, 공익적, 정신적 가치를 선택했다. 또한 강력한 독재적 지도자로서 모든 권력을 독점했고 전 국민적 지지를 얻었음에도 평생을 검소, 청렴을 유지했고, 사후에는 사저와 묘지도 남기지 못하게 했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도 철저하게 사(私) 배제하고 공(公)을 실천한 것이다.


‘군대 없고, 자원 없고, 땅 없고, 구성원들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 등인데 서로 싸우기나 하지 정말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도시 국가’의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실용주의’, ‘인종, 언어, 종교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국가시스템’라는 탁월한 대안을 천명하였다.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선구안(選球眼)과 역시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慧眼)을 동시에 가졌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그가 인식했던 현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며, 그가 제시했던 대안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대안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고 자원이 없으며, 남북으로 나뉜 것도 모라자서 지역, 연령, 성별로, 정파로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해묵은 이념 논쟁과 허울뿐인 명분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고 감정에 치우쳐 실리, 실용을 모두 놓치고 있다. 그래서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선구안(選球眼)과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慧眼)을 동시에 가진,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도 철저하게 사(私) 배제하고 공(公)을 실천할 만큼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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