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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Feb 11. 2020

그러나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고

슬기로운 이별생활 (5)

슬기로운 이별생활

(5) 그러나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고        




미도는 대학 시절 같은 과 동기였다. 졸업 이후 중간 중간 연락이 끊길 때가 많았는데, 대개 그녀가 연애를 하고 있을 때였다. 미도는 연애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싶어지면 꼭 나를 불러 상대를 소개해주었다. 그건 묘한 일이었다. 나와 미도는 사생활을 공유할 만큼 친하다기보다 서로 예의바른 형태로 친했기 때문이었다. 계절이 바뀌거나 새해가 오면 안부 인사를 전하듯 ‘언제 한 번 봐야지’ 라고 말하는 사이. 그러다 연말쯤 숙제를 해치우듯 후다닥 만나 밥만 먹고 헤어지는 사이.           


미도의 연인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미도는 자신과 정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을 좋아했는데, 그러다보니 조건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이과남자 (미도는 문과에 기계치였다)
외동아들 (자신의 언니오빠 발에 말발굽이 달려있다고 믿는 미도였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을 것 (자취는 너무 외로워, 라고 미도는 말했다) 
리더십이 있을 것 (미도는 심각한 결정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미도가 소개한 네 번째 연인은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나는 미도가 내민 청첩장을 좀 놀란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26살인 미도에게는 좀 이르다는 느낌 때문이었다(남자는 32살이었다).          



“너, 취직준비 하던 건?”          


대학 졸업 후 미도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험은 접은 거야? 결혼하고 나서 취직하려면 좀 애매하지 않아? 내가 묻자 미도가 쑥스럽게 웃었다.         

            


“오빠가 4대 독자야.”

“그래?”

“응. 오빠네가 손이 좀 귀하대.”

“그래. 근데?” 

“아기는 일찍 낳는 게 좋다고 해서.”

“누가?”


“오빠가. 산모가 어릴 때 낳은 아기가 건강하고 머리도 좋대.”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 미도를 쳐다봤다. 나는 미도의 인생에 대해 물은 거지 남자가 원하는 산모 조건을 물은 게 아니었다. 너도 동의한 거야? 미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청첩장에 찍힌 날짜는 삼 주 후였고, 곧 예비신랑인 남자가 합류할 참이었다.           



남자는 퇴근하자마자 우리가 있는 카페로 왔다. 그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대뜸 ‘할 일 없는 사람 많네’ 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는데, 그 말이 미도와 내게 하는 가시 박힌 말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오빠가 카페를 싫어해. 커피값도 비싸고, 하는 거라곤 수다 떠는 거밖에 없잖아. 여기선 다들 긴장감도 없고 게으르고. 아무튼, 밥 먹으러 가자.”          



미도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와 이름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정한 밥집으로 옮겨갔다.                    



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용하고 테이블 간격이 넓은 장소를 생각했지만 남자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부대찌개 집이었다. 저녁 시간이라 테이블마다 복잡하고 우렁찬 소리들이 울려나왔다. 부글부글 끓는 찌개를 그는 잘도 떠먹었다. 서로에게 무언가 하나를 물을라치면 한참 목청을 돋워야 했다. 나는 햄조각을 뒤적이며 말을 아꼈다. 그에게 딱히 물을 것이 없었고 그도 딱히 내게 궁금한 게 없어보였다. 분위기가 삭막해지자 미도가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턱 내려.”           


공기밥을 두 그릇째 먹던 남자가 갑자기 미도에게 말했다. 주위의 소란 때문에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미도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옆에 앉은 남자에게 귀를 가져다댔다. 뭐라고, 오빠?          



“미도, 턱 내려. 왜 이렇게 나불대?”



미도는 말을 할 때 턱을 들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미도의 키가 남들보다 조금 작기 때문이었다. 앉은키가 작은 미도로서는 턱을 들어 올려야 상대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는데, 한참 이야기에 몰두하다보면 턱이 한껏 들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그걸 지적하고 있는 거였다.           



“지금 미도한테 턱 내리라고 하신 거예요? 왜요?”

“보기 싫어서. 미도는 턱 내리고 가만히 있을 때가 예뻐.”           



미도가 거기 덧붙여 ‘나는 사각턱이니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턱 내려, 라고 말하던 남자의 억양이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하는 ‘앉아’ ‘기다려’의 억양과 꼭 같았다는 것은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부대찌개를 싹싹 긁어먹은 다음에야 (오빠가 음식 남기는 거 싫어해, 라며 미도가 기어코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전부 먹었다) 남자는 내게 이런 저런 것들을 물었다. 무슨 일해요? 가족이랑 같이 살아요? 미도랑 언제부터 친했어요? 주량은 얼마나 돼요? 하는 식의 맥락 없는 질문들이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답하자 남자가 흐음, 하며 팔짱을 꼈다.           



“이건 또 다르네.”

“뭐가요?          



이건? 지금 날더러 이거라고 한 건가?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일부러 시비를 건 건 아니었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지난주에 미도가 보여줬던 친구들이 있는데. 걔네랑 그쪽은 다르네. 어느 쪽이 진짜지?”           



나는 미도가 보여준 친구들이 누구였을지 짐작이 갔다. 미도와 고교시절부터 친구였던 유쾌한 집단에 대해 나도 서너 번 얘기들은 적이 있었다. 미도가 그들과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개성적이고 발랄해서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날 정도였다. 그들은 미도보다 일찍 공무원시험에 붙은 상태라 미도에게 이런저런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회사 일에도, 노는 일에도 열심히인 타입이랄까.       


         


“여자들이 술을 아주 죽자고 먹더라고. 
내가 사니까 공짜술이라고 그렇게들 먹었나본데 술 취해서 토하고 시끄럽고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애들이었거든.
 근데 그쪽은 다르네. 진짜 미도 친구 맞아?”




일찌감치 말을 놓은 남자가 히죽 웃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고,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드를 꺼내 밥값을 계산하려는데 미도가 서둘러 뛰어왔다. 남자는 테이블에 앉아 아직 남은 반찬인지 뭔지를 주워 먹고 있었다.          


“계산을 왜 네가 해, 내가 할게, 이리 줘.”

“됐어.”      


미도와 내가 가게 밖으로 나온 뒤에야 남자가 느긋하게 걸어나오며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이거 미도 친구한테 밥을 다 얻어먹어보네.”                   



          





나는 미도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도의 청첩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제서 알게 된 남자의 이름도 싫었다. 남자가 비아냥거리던 얼굴이 내내 떠올라 나는 한참 분을 삭였고 미도에게 ‘너는 그래도 괜찮냐’고 묻는 문자를 보냈다. 미도의 답은 간단했다.           



“오빠가 사회인이라 꼼꼼하게 따지는 게 많아서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야.           




내가 보낸 문자에 미도는 더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식에 올 거냐고 묻지 않았고 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인연이 거기서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미도는 뜬금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신혼집에 놀러오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오빠가 보고 싶어해.”          


뭐? 나를 왜? 나는 대화도 없이 씩씩대며 헤어졌던 남자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내 짐작이 갔다. 그는 또 깐죽대며 미도에게 물었으리라. 친구라더니 결혼식도 안 오고 집들이도 안 왔네, 진짜 친구 맞아?           


남자와 다시 만나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나는 미도가 좋았다. 인간적인 호감이 기저에 깔려있으니 지금껏 연락해왔고, 미도가 곤란하다면 가능한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철저히 미도의 취향에 맞춘 침실스탠드를 하나 사 들고(배송을 하면 간단했겠지만 뒤늦게 도착할까 봐 백화점에서 구매해 직접 들고 갔다)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미도와 점심을 먹고 (남자가 그토록 혐오하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남자가 퇴근해 돌아오면 신혼집으로 가 함께 저녁을 먹는다, 는 일정이었다.           



미도는 근처에 맛집이 있다며 나를 데려갔다. 장어집이었는데 그게 누구 입맛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생선류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가시가 많고 비린 장어는 질색이었지만 미도가 너무 신이 나 있어 거절하기 어려웠다. 장어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미도와의 수다는 즐거웠다. 전에 네가 밥 샀으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미도가 그렇게 말하며 계산을 하기 전까지는.           


카드로 계산을 끝낸 미도가 돌아서자마자, 그야말로 가게에서 채 나서기도 전에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오빠가 웬일이야? 미도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통화 볼륨을 잔뜩 키워놓았는지 남자의 목소리가 밖으로 선명하게 새어나왔다.                



“야, 나는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너는 장어나 먹고 자빠졌냐?”


 

카드결제문자를 받자마자 미도에게 전화를 건 남자는 이후에도 뭐라 뭐라 떠들어댔다. 미도가 황급히 통화볼륨을 줄인 탓에 더는 들리지 않았으나 무슨 말일지 뻔했다. 전화를 끊은 미도는 ‘오빠가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라고 변명했다. 벌써 지긋지긋한 기분이었다.           



“점심은 미도가 샀으니 저녁은 제가 살게요.”           



신혼집에 초대받아서, 집들이선물도 가지고 간 마당에 밥까지 사야하나 싶었지만 나는 퇴근해 돌아온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이 앞에 일식집에 새로 생겼는데 거기 갈까? 내가 생선을 좋아하거든. 남자가 떠들어댔다. 보다 못한 미도가 옆에서 말렸다. (말리면서 하는 말이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오빠, 온도가 사온 스탠드가 십 오만원이 넘어. 저녁은 우리가 사야지.’) 남자가 마지못한 얼굴로 뭐 먹을래 물었다.        


“그냥 짜장면이나 먹어요.”          


내 말에 남자는 다시금 기뻐했다.                



우리는 짜장볶음밥, 홍합짬뽕, 탕수육을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았다. 대화거리는 딱히 없었고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집이 깔끔하네요, 청소기는 저게 좋죠, 결혼사진이 예쁘게 나왔어요)을 꺼내놓았다.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와 혼자 한 병을 비운 남자는 갑자기 미도가 살림을 못한다고 흉을 보기 시작했다.    


       

“얘네 부모님이 전라도 사람이잖아? 근데 어떻게 음식을 못할 수가 있지? 빨래를 해도 건성건성 청소를 해도 대충대충 얘가 좋은 대학 못간 이유가 있는 거야. 뭐든 대충하는데다 머리가 나쁘더라고.” 

“그 좋지 못한 대학 나도 같이 다녔는데.”      


내가 말을 놓자 그는 ‘어린 게 어디서’ 라며 내게 큰소리를 냈다. 어린 것은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네요. 내가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자 그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미도, 남자 몇이나 있었냐?”

“뭐?”     


“나 전에, 미도가 남자 몇 명이나 만났냐고. 친구면 알 거 아냐. 두 명? 다섯 명? 미도 자취했으니까 걔네가 집에도 드나들고 그랬지?”          



나는 미도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 밖으로 끌려나온 미도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미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어제 오빠한테 전여친 얘기 듣고 잔소리했거든. 그래서 그래, 그래서 나 놀리려고 저러는 거야.           


미도야.           


나는 미도를 불렀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미도야. 미도야.           


나는 미도를 부르며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났다.



 





손이 귀하다는 건 거짓말이었는지 미도는 딸 하나, 아들 둘을 낳았다.      


남자가 돈돈, 했기 때문에 미도는 첫째를 낳기 사흘 전까지 출근을 했고, 베이비시터를 부르는 돈은 또 아깝다고 해서 출산 후엔 직장을 그만뒀다. 아이들이 두 살, 한 살 터울로 태어나 미도는 몸조리 할 틈도 없이 육아에 시달렸다. 당연히 독박육아였다. 나는 이 모든 얘기를 미도가 아닌 다른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미도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미도를 떠올리고, 부대찌개 집 앞에서, 미도의 신혼집 현관 앞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미도야. 미도야, 그만둬. 미도야, 도망쳐. 나는 그런 말들을 한다. 의미도 없이 자꾸만. 자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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