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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Feb 05. 2020

타인의 이별에 간섭해야 한다면

슬기로운 이별생활(4)

슬기로운 이별생활

(4) 타인의 이별에 간섭해야 한다면               




그녀는 애초부터 수상했다. 순도는 그녀가 사진 찍기를 극도로 꺼린다고 말했다.      

     

“사진 찍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지.” 

“아니, 사진 찍는 건 되게 좋아해.”

“그럼?” 

“나랑 사진 찍는 걸 싫어하더라고.”           


솔직히 그 순간부터 촉이 왔다. 순도는 그녀의 인스타계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여기는 나랑, 여기는 친구랑, 여기도 친구랑 간 데야. 그녀의 인스타에는 삼청동, 한남동은 물론 강화도, 무의도까지 서울과 인천을 오간 흔적이 빼곡했다. 똑 떨어지는 조명 아래 고급스러운 디저트 사진을 찍는 게 취미인 듯 했다. 대부분 카페나 레스토랑 사진이었고 드물게 일러스트 전시회나 영화관 사진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친구와 다녀온 곳에는 해시태그를 어마어마하게 찍어두었다. 에어팟과 화장품, 파우치 등을 올려둔 테이블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친구와 얼굴을 맞댄 셀카를 큼지막하게 올려두기도 했다.      


순도와 다녀온 곳에는 건조한 해시태그가 붙었다. 가게상호나 위치, 메뉴가 간략하게 쓰여 있을 뿐이었다. 순도가 언급된 게시물은 딱 하나. 그녀의 생일에 갔다는 레스토랑, S호텔 홀사이즈 딸기케이크와 구찌 쇼핑백이 놓인 테이블 사진 아래 ‘내 소중한 사람 항상 고마워’라고 적혀 있는 게 전부였다. 순도의 사진은 당연히 없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순도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시물이었다.           



물론 그것만 해서는 사람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을 몇이나 알고 있다. SNS계정 자체가 없는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얘기했다면 나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순도, 다름 아닌 순도의 말이었다.                      



순도의 흑역사는 꽤 화려했다.




애초부터 순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양다리를 시전 중이던 내 친구 때문이었으니 더 설명할 것도 없다. 순도는 너무 순종적이고 선한 남자였고, 귀가 얇고 마음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는 순도에게 하는 거짓말을 나날이 늘려가더니 어느 날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쟤가 저렇게 눈치 없이 맹꽁하게 굴어서 그래. 내가 이러는 건 다 순도 때문이야. 쟤가 날 못된 인간으로 만든다니까.”           



나는 친구와 대판 싸웠고, 순도를 불러내 술을 사줬다. 분노에 차 떠들어대는 내 앞에서 순도는 얌전히 술을 마시다가 ‘그럼 이제 못 만나는 거네.’ 하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순도는 어린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순도는 다단계에 빠진 동아리선배를 해맑게 따라갔다가 다세대주택에 감금되기도 했고, 지하철역에서 일본 유학생이라 노선을 잘 모르니 길을 알려달라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괴상한 종교단체에 발을 내딛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순도의 친구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있어!’ 하고 외쳐야 할 때가 많았다. 영등포역에서 만난 노신사가 대구에서 열리는 학회에 꼭 참석해야 하는데 지갑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며, ATM기에서 십만원을 뽑아 빌려줬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사람이 순도였다.          


 

“니가 그러겠다고 했어?”

“내가 현금이 없어 죄송하다고 했더니, 교수님이 백 미터 앞에 돈 뽑는 데가 있다고 알려주시더라고.”         


 

으이구, 등신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순도는 순도답게 속았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옆에서 그거 사기야, 라고 말해주면 깜짝 놀라거나 어쩔 수 없지, 하고 바로 체념했다. 그렇게 누구도 의심할 줄 모르는 순도였는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드디어 순도도 성장하는 건가.               



           





순도는 두 살 연상인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순도는 늘 그랬다. 전심을 다해 사랑하고 헌신했다. 순도의 연애사를 듣다 보면 골든 리트리버가 떠올랐다. 오로지 주인만을 사랑하고 곧잘 망부석이 되어 하염없이 기다리는 폼이 딱 그랬다.      


그녀는 아현역 근처에 살았고 직장은 일산이었다. 그건 또 상당한 거리네. 출퇴근 할 때마다 아비규환이 되는 경의중앙선을 떠올리며 내가 말하자 순도는 그래서 내가 데려다줘, 라고 말했다.           



“네가 데려다준다고? 매일?”

“응.”

“너 출근은?”

“데려다준 다음에 하지. 아침에 조금만 일찍 나가면 돼.”           



조금만 일찍이 아닐 텐데. 나는 혀를 찼다. 순도의 직장은 양재역에 있었다.                



순도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그녀와 매일 만나는 셈이지만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아침출근길에 그녀는 차에 타자마자 못다 한 화장을 빠르게 끝마치고는 바로 잠을 잔다.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 건 아는데, 음, 저기, 가끔은 내가 대리기사가 된 것 같아.’ 순도는 작게 말했다. 그녀는 종종 밤에 전화를 걸어왔다. 늦게까지 회식 자리에 붙잡혀있거나 친구와의 만남이 늦어진 경우였다.      



“그럼 데리러 가?”

“가야지. 밤인데 위험하잖아.” 

“그럼 회사 사람들하고 안면도 텄겠네?”     


“아니. 회사 근처나 역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그럼 회사 사람도, 친구도 본 적 없어?”     



순도는 잠시 말을 멈췄다. 뭔가 곰곰 생각하는 듯 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한 명 봤어. 만난 적 있어.”

“그래? 뭐, 같이 밥 먹었어? 아님 술?”

“어, 그건 아니고. 친구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느라.”    

      

그러니까 꽐라 된 친구 안전귀가용이었단 소리였다. 그녀는 주말마다 가족모임과 물리치료와 친구 결혼식과 동호회활동으로 늘 바쁘다고 했다. 따져보니 그녀가 순도와의 데이트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더 만나고 싶어, 라고 순도가 말하면 그녀는 매일 보잖아, 라고 대답했다.      


         

“당분간 출퇴근을 각자 해보자.”      



나는 순도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매일 볼 수 없게 되면 그쪽에서도 너랑 만날 시간이 애틋해질 거 아냐. 연애란 건 그런 거잖아, 보고 싶고 그리워서 어떻게든 만날 방법을 찾는 거. 지금까지는 네가 그랬으니까 이번에는 그쪽에서 하게끔, 응? 이건 그냥 밀당이야, 밀당.”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이랬다.        


   

순도야, 너는 호의고 선의겠지만 그녀는 그게 하나도 고맙지 않을 거야. 처음 얼마간은 즐겁고 고마웠겠지. 근데 그게 반복되면 사람은 무감해지고 뻔뻔해져. 다정한 연인에서 편리한 호구가 되는 건 순식간이야.           



       





순도는 얼마간 연락이 없었다. 궁금해진 내가 전화를 걸자 그가 어물어물하더니 대뜸 미안해, 라고 말했다.           


“너랑 만나지 말래.”

“누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녀였다.      



당분간 일이 바빠서, 라는 이유를 처음엔 그녀도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출근시켜주기를 안 한 지 사흘째가 되자 그녀는 전화도 톡도 받지 않았다. 순도가 전화하자 ‘출퇴근하느라 힘들어 죽겠’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고, ‘너는 내가 중요해 일이 중요해?’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순도는 조금 더 버텨보려 했으나 닷새째 되는 날 한밤중까지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자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고 말았다. 그러고는 진실을 고해바친 모양이었다.      


순도는 그녀 앞에서 내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팔로우를 끊었다. 순도는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더니 이내 기쁨을 참지 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주말에 친구 소개받기로 했어. 이십 년지기 베프래.           



그래, 너는 순도지. 이번에도 순도가 순도했구나.           



나는 연락처가 삭제된 사람답게 더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은 그들이 내릴 것이고 그 안에서 흠집 나는 감정들은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적어도 지금 순도는 다단계회사와 사이비종교에서 구출해 와야 했던 순간보다는 덜 위험했다. 마음이야 다치겠지만 그럼 어떤가. 순도는 이제 의심할 줄 아는 순도가 되었는데. 닷새나 버티다니 장족의 발전이지.         


  

순도는 그녀와 잘 만났다. 그녀에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지루해’라는 말을 듣고 야무지게 차이게 된 건 그로부터 먼, 먼 훗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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