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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Feb 12. 2020

이별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슬기로운 이별생활 (7)

슬기로운 이별생활 (7)

이별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와 만나는 날에는 늘 비가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름이니 소나기가 흩뿌리는 일은 흔했겠으나 그와 함께 맞는 비는 가늘고 촘촘한 형태의 가랑비일 때가 많았다. 부옇게 피어오른 물 아지랑이가 사방에 가득해 새벽의 호숫가에 선 기분이었다.     



“오빠만 만나면 비가 내리네.”      



내가 말하자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차는 도로 한 복판에 서 있었고 우리 앞의 사거리는 오래도록 빨간 불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거리는 빗방울만이 가득했다. 한낮의 열기가 식은 아스팔트는 미지근하고 축축한 입김 같은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몇 번 안 돼.”          



마침 신호가 바뀌어 그가 액셀을 밟으며 말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옷깃 스치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그는 늘 차안에서 얇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게 에어컨 온도를 지나치게 낮추는 나 때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맑은 날이 훨씬 많았어. 우리가 만난 날 중에는.”

“그래? 아닌 거 같은데, 맨날 이렇게 비 내렸잖아.”      


그가 검고 길게 펼쳐진 전방의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게 비오는 날인 것뿐이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래서인지 늘 쾌적하고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에어컨 바람이 선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에어컨 세기를 조절한 뒤 입을 다물었다. 그저 비가 온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지 싶어 의아한 마음이었다.          



“너는 늘 비가 내린다고 하는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집 앞에 내려놓은 그는 조용히 이별을 고했다. 머리 위로 가늘고 축축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 나는 줄곧 몸을 떨었다. 이왕이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얘기했음 좋았잖아. 그가 고한 이별보다 그런 식의 불만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와 만난 날들을, 그날의 날씨들을 헤아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날들이 덥고 맑았다. 심지어 우리는 장마기간 동안에는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다. 소리 없이 벌어진 균열은 막을 새도 없이 마지막 지점에 다다른다는 걸. 이별은 이별의 속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더없이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그는 마지막 지점을 나보다 먼저 발견해 입에 올렸을 뿐이었다. 여름인데도 몸이 으슬으슬해 나는 에어컨을 끄고 얇은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와의 이별에는 그만큼의 냉기만이 남았다.                



          





그는 말수가 적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매력적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인 사이였음에도 그와 단둘이 있는 순간이 무겁고 불편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 늘 무슨 얘기를 할까 고심했다. 주머니에 총알을 쟁여두듯 주섬주섬 그날의 이야기 거리들을 챙겨나가야만 했다. 한참을 혼자 떠들다보면 내가 지나치게 경망스럽고 수다스럽게 느껴지기 일쑤였다.           



“나랑 있는 거 심심하지 않아? 재미없지?”          



나는 습관처럼 그에게 물었다. 그는 늘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대답하는 그의 콧등이 미묘하게 찌푸려져 있어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회사 욕을 신나게 하고 있다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추임새를 넣듯 그랬어? 그랬네, 너무하다, 같은 말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그만 말을 끊었다. 역시 이런 얘긴 재미없다. 그치? 그가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넌 나랑 있는 거 재미없니?”          



내가 물은 걸 왜 되묻고 난리람. 입 꾹 다물고 아무 얘기도 안하는 건 그쪽이면서. 나는 투덜거리다 다시금 회사 흉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가로저었고, 스콘과 버터가 담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내게 하는 행동은 하나하나 섬세하고 다정한데 그는 어째서 말을 하지 않을까. 저렇게 남의 말만 듣고 있으면 금세 지겨워지지 않나.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스콘을 부서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당시의 침묵이 막막했던 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무슨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전전긍긍했던 건 나였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그가 그럴 거라고, 그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감정을 떠넘긴 것뿐이었다. 그는 나중에 내게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와 말없이 나란히 앉아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고 즐거웠어.
그런데 너는 아니었지.
그걸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마.”




아무 문제도 없기 때문에 이별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취향을 주장하는 편이 아니었다. 우리의 입맛은 그럭저럭 비슷했는데 그건 둘 다 보편적인 메뉴를 골라왔기 때문이었다(더우니까 냉면 먹을까? 에어컨 오래 쐬었더니 좀 춥네, 국물 있는 걸 먹으러 가자. 비 오니까 튀김은 어때? 하는 식의 선택들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타인의 부산스러움을 목격하는 쪽의 데이트를 즐겨했다. 함께 운동을 한다거나 나들이를 간다거나 하는 일보다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맞았다. 퇴근 시간은 대개 일정했고 토요일에는 데이트를 하고 일요일에는 각자의 공간에서 온전히 쉬었다. 익숙하고 순조로운 나날이었지만          



그와 나의 기억은 늘 어긋나는 것 투성이었다.          



라떼가 맛있었던 상수역 카페를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말했던 가로수길 셔츠집을 기억하지 못했고 함께 갔던 가게 간판을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달리 떠올렸다. 호수공원에 갔던 때를 그는 봄, 나는 여름이라 말했다. 나는 그가 짙은 밤색의 체크코트를 입고 나온 적이 있다고 기억했는데 그는 그런 옷이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내게 연노랑색 블라우스가 예뻤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노란 색 계열 옷은 입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먹었음에도 

그와 나의 기억은 항상 달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은 것을 공유한 적이 없던 것 아닐까. 

나란한 감정으로 서로를 들여다본 적은, 없었던 게 아닐까.                  


   

우리의 이별은 너무 당연해서 누구도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모든 이별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어떤 이별은 부지불식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수긍해버리는 형태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한여름의 드문 가랑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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