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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Feb 15. 2020

어떤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

슬기로운 이별생활 (8)


슬기로운 이별생활

(8) 어떤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     




               

파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고3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자리배치가 바뀌면서 옆에 앉은 파도를 보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 반에 이런 애가 있었나? 아무리 시야가 좁고 사람 얼굴 못 외우는 나라지만 그토록 낯선 얼굴은 처음이었다. 나는 쭈뼛쭈뼛 파도와 인사를 나눴다. 파도의 목소리와 억양마저 난생 처음 듣는 그것이라 당혹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지금은 그 낯섦의 이유를 안다. 파도의 특기는 숨죽이기,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었다. 파도는 어느 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정말 쉬워. 내가 잠깐 숨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왜냐하면.”       

   

파도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머릿속엔 내가 없거든. 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손쉽게 내 존재를 없애버리는 거야.”         


 

그 사람. 파도는 자신의 엄마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더 거친 단어를 사용해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파도는 늘 그랬다. 마치 어제 집에 들어가다 마주친 이웃집 여자 얘기를 하는 것처럼. 감정의 가닥이 전부 닳아 없어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 사람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가계부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밤 11시 30분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야자가 끝나면 독서실로 가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다 독서실승합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다. 학교 0교시가 7시 30분에 시작되었으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5시간 남짓.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악독한 시간표였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고는 있었으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졸거나 멍하니 딴생각을 하며 보냈다. 그 날도 모의고사 오답노트를 만들다 말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파도가 내 손등을 톡톡 쳤다. 온도야 혹시 자 있으면 빌려줄래? 나는 거대한 필통을 뒤져(기능별, 색깔별 문구류를 전부 쓸어 담은 거대한 필통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자를 꺼내주었다.           



파도는 뭔가를 열심히 긋고 열심히 써넣었다. 오답노트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글자와 숫자들이 생소했다. 참4, 참5 같은 글자들을 연이어 쓴 다음 파도가 신중히 써넣은 글자는 두부, 양파, 비엔나소세지, 쌀5kg 같은 것들이었다.           



“뭐하는 거야?”

“가계부 써.”

“가계부를 왜 네가 써?”

“살림을 내가 하니까.”      


나는 소곤소곤 다시 물었다.      


“가계부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써야 하는 거야?”

“제대로 안 쓰면 맞으니까.”

“누구한테?”

“그 사람, 엄마한테.”           



그러니까 엄마는 있지만 살림은 파도가 하고, 가계부를 제대로 적지 않으면 엄마한테 맞는다는 얘긴데, 그걸 설명하는 파도의 얼굴이 지극히 태연했다. 마침 파도는 참2를 써넣고 있었고 그게 뭐야 물으니 참이슬 2병이라고 답했다.     



“그 사람이 집에 있는 날에는 꼭 사다놔야 돼.”

“니가 술을 어떻게 사?”

“슈퍼할머니는 내가 새댁인 줄 알더라고.”

“엄마한테, 저기, 자주 맞아? 심해?”


“별로. 도배할 때 쓰는 빗자루 같은 걸로 몇 대 후려치는 정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해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가정폭력 같은 걸 언급하기에(엄마가 너를 때린다고? 선생님한테 상담해볼래? 청소년상담전화 같은 건 어때?) 파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뭐야, 뒤늦게 사춘기냐?) 파도와 나는 농담을 나눌 만큼 친하지 않았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는지 파도가 소리죽여 웃었다.           



“괜찮아, 어디가 부러지거나 할 만큼 때리진 않아. 내가 다치면 그 사람 손해거든.” 

“그, 그치? 아무래도 엄마니까 그 정도로는, 네가 다치면 속도 상하고.”     



“아니, 그런 거 말고. 내가 다치면 병원비 들잖아.
게다가 청소도 빨래도 밥도 다 해주는 무료도우미가 없어지는데
손해 볼 짓을 왜 하겠어.”



나는 그 날 파도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고만고만한 형편의, 고만고만한 이력과 고민을 가진 아이들이 교실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진학에 대한 압박과 부담, 성적과 관련된 부모와의 다툼, 그 정도가 합당한 고민의 총량이라 믿어왔던 것이다.      


파도의 이야기는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파도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누구나 그 정도의 불행은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듯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파도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게 두려웠을 뿐이면서 말이다.           







          

불행한 이야기의 시작이 으레 그렇듯 파도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죽었다(나는 그 죽음에 대해 너무 여러 번, 상세하게 듣는 바람에 내가 직접 목격한 것처럼 장면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간접적 트라우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도의 엄마는 공사 일을 다니며 파도와 파도의 오빠를 키웠다. 파도의 오빠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지방으로 내려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기술이 없는 그냥 잡부 수준이라 일 주는 현장이 있으면 그냥 따라가. 지방으로 한 달씩 가 있을 때도 있고, 두 달씩 일이 없을 때도 있어.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술만 마시는 데다 엄청 예민해지니까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있어야 돼. 내가 눈에 띄면 욕하거든. 공사 없을 땐 도배도 도우러 다니고 해서 딱히 사정이 어렵진 않아. 먹고 살만큼, 지방에서 오빠가 사고 치면 합의금 물어줄 만큼은 돼.” 

“그럼 너를 왜 때려?”


“내가 학교 다니는 게 싫어서.”           



파도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그 사람은 파도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했다고 말하자 대꾸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부엌에서 우당탕거리던 그 사람은 도배풀을 한 가득 쑤어가지고 나와 파도에게 끼얹었다. 다행인 건 파도가 그녀가 ‘무슨 짓’이든 할 거라는 생각에 잔뜩 경계태세로 있었다는 점과, 풀의 점성이 높고 무거워 파도가 몸을 피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점이었다.           


그 사람은 시시때때로 파도에게 ‘학교를 때려치우라’고 강짜를 부렸다. 그러면서도 학교 등록금과 급식비, 문제집 값은 내주었다. 대체 뭐지?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도망가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그 사람이 현장에서 가져온 옷들은 흙과 시멘트 가루로 엉망이었다. 세탁기를 돌리면 시멘트 때문에 세탁기가 고장 나니 일일이 손으로 두드려 털고 주물러 빨아야했다. 파도는 중학교 때부터 일복 빨래를 시작했다. 반찬을 만들고 두부김치나 돼지고기김치찌개 같은 안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중학생 때부터였다. 왜 그때부터야? 라고 물으니 파도는 “그 때 오빠가 도망갔거든.” 이라고 답했다.           



파도와 그 사람의 관계는 기이한 형태로 의존적이었다. 파도는 아직 미성년자이니 보호자가 필요했고, 그 사람은 가사 전반을 모두 책임지고 있는 파도가 필요했다.      


“일단 내가 스무살이 되어야 해. 꽤 전부터 돈도 모아왔어.”     

“가계부를 그렇게 빡빡하게 쓰면서 어떻게 돈을 모아?”

“참이슬.”     


나는 가계부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참4, 참7 따위를 떠올렸다.           


“맨날 술을 마시니까 자기가 얼마나 마신지 모르거든. 그 사람이 친구들 데려와서 술 마시는 날엔 더 해. 세 병, 네 병씩 더 써놔도 몰라.” 

“돈을 모아선 어떡할 건데?”


“도망가야지. 오빠처럼. 멀리.”                     







             

나는 수능 날까지 파도와 짝이었다. 두 번 정도 자리교체가 있었으나 반 아이들이 쉽게 자리를 되바꿔 주었다. (야자시간에 소곤소곤 떠들었다고 생각한 건 우리의 착각으로, 파도가 늘어놓은 ‘그 사람’ 이야기를 주변 아이들도 들은 모양이었다. 소문이 퍼져 파도와 앉는 걸 꺼려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파도의 인생사는 그야말로 험난하고 심란한 것이어서 그 아이들의 꺼려함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만 해도 몇 차례나 악몽에 시달렸고,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쏟아져 나오곤 했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도울 수 없겠냐고 물을 때마다 파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 준비하고 있어. 과거사에 대해선 낱낱이, 지나칠 만큼 상세히 얘기해주는 파도였는데 수능 이후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수능 한 달 전부터는 파도도 나도 시험공부에 집중했다. 수능 날까지 극도의 피로감이 쌓였고, 수능을 본 다음날부터 성적표가 나올 때까지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수능 이후 딱 세 번 학교에 갔는데, 수능 성적표를 받는 날과 대학 원서를 써내는 날, 졸업식 이렇게 세 번이 전부였다. 파도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파도의 ‘도망’이 전원기숙사제의 지방대학에 전학년장학금으로 합격하는 것, 이라고 내내 믿어왔었다. 그런데 파도는 원서를 쓰지도, 학교에 오지도 않았다.         


       

“나는 괜찮아. 준비가 끝나면 연락할게.”            


    

파도에게서 온 건 그런 내용의 이메일이 전부였다. 3월이 되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느라 파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져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사실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동정조차 할 수 없는 그 캄캄한 기록을 이제 더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 년 만에 파도는 내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기억했다. 내 이메일주소는 파도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파도만큼 내게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이는 그 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메일에 핸드폰번호를 적어 보내자 단번에 전화가 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보자.” 그렇게 말하는 파도의 목소리가 몹시 쾌활했다. 나는 그녀가 비로소 준비를 끝냈음을 알게 되었다.           



파도의 행보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대학은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어. 집에 들어가기 싫으니까 그냥 학교에 있었던 거야. 파도는 국비지원으로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생 중 한 명과 방을 하나 얻어 통학하며 기술을 배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람이 전문학교로 찾아왔었어. 일주일쯤 학교도 못 가고 집에 숨어 있었는데 날 찾겠다고 학교에 가서 계속 행패를 부린 모양이야. 누가 말해줬는지 기어코 집에 찾아와서는 문짝을 깨놨지. 그 사람이랑 남자랑 둘이서.”          


파도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고3 시절엔 뒤로 꽉 잡아매놨던 머리가 어깨 너머로 길게 풀어져 있었다. 교복차림에 졸라맨 머리가 아닌 파도는 고3 여름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낯설었다.           



“그제야 떠날 결심이 서더라. 그때까진 나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었나봐. 작정하고 다른 지역으로 떴음 날 못 찾았을 텐데. 지방을 수소문해 찾아다닐 만큼 나한테 열정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오만정이 다 떨어진 상태였는데도, 막상 떠나려니까 잘 안 되더라고.”               



파도는 지방으로 내려가 직장을 구했다. 그건 정말 도망이었노라고 파도는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차근차근 준비했는데도 결국 독립이 아닌 도망이었다고. 조금이라도 당당한 형태로 문을 박차고 나서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고.        


        

“이상하지. 겪지 않아도 됐을 별별 일을 다 겪었는데, 어지간해서는 더 놀랄 일도 아플 일도 없다고 자신했는데. 망가진 문을 제대로 닫지도 못하고 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서러운 거야. 그 쪼개진 문이, 너무 아픈 거야.”               


파도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것이 그녀가 고백한 최초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도는 삼촌 집에 맡겨졌을 때 삼촌이 내던진 드라이버에 이마가 찢겨 흉터가 났다는 애기를 한 적은 있지만 그게 어느만큼 아팠는지는 얘기한 적이 없었다. 야자가 끝난 뒤 집에 돌아가 그 사람과 남자의 일복을 빨고 밥과 반찬을 하고 청소를 하고 나면 새벽 3시가 넘어 잠잘 시간이 부족하다고 얘기 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피곤하다거나 손목이 아프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           



“몇 번이고 네게 연락할 생각을 했는데 이상하게 안 되더라. 온도 너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너랑 했던 그 사람 얘기가 떠올라. 네 뒤에 자꾸 그 사람이 따라붙는 거야.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그 사람을 완전히 끊어내야, 과거를 다 지워버려야 나는 행복해질 수 있어.”           


     

나는 파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하지 않았던가. 파도는 진심이었을 테고 진심의 형태는 늘 절박했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파도의 핸드폰을 가져다 내 전화번호를 지웠다. 약속장소에 오기 전까지 주고받았던 문자와 통화목록도 전부 지웠다.        


   

너는 잘 지내고 있었어? 파도가 덧붙이듯 내 안부를 물었다.


그럼. 나는 잘 지내고 있었어. 

앞으로도 잘 지낼게. 

네가 굳이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진 몇 장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파도와 연락이 끊긴 뒤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당시에는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때였고, 생년과 이름을 입력하면 회원검색이 가능했다. 파도의 본명은 한국의 김지영 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다. 나는 수십, 수백 페이지씩 뜨는 파도들을 전부 다 뒤져, 기어코 파도를 찾아냈다.           



나는 지방의 작은 전자회사에 입사한 파도를, 회식자리의 메뉴를, 파도의 작업복을 파도의 말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나는 파도 연인의 뒤통수와 하하 웃는 옆얼굴을, 먼 훗날 파도의 시동생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 달아놓은 짓궂은 댓글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평온해졌으므로 이제 내가 알지 않아도 될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그녀가 끊어낸 지점에 속해 있는 나는, 
이제 열어보지 말아야 될 것들이었다.           



파도가 만들어준 이메일 계정을 삭제하는 데에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파도를 삭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파도가 매미허물처럼 벗어두고 간 과거를 먼지로 되돌리는 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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