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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온도 Feb 19. 2020

이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슬기로운 이별생활 (9)

슬기로운 이별생활

(9) 이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도도는 늘 누군가와 싸우고 있거나 싸우기 직전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도를 알게 된 건 연노랑 병아리 시절이었다. S생명 1층 로비에 있는 타원형의 안내데스크가 도도와 내가 담당한 공간이었다. 실용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연노랑색 투피스와 하늘색 공단으로 라인을 넣은 연노랑 챙모자가 당시 유니폼이었다. 무채색 로비에서 우리의 연노랑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팀장은 어째서인지 채도가 선명한 레드립스틱을 바르라고 종용했다. 안내데스크 일은 다리가 퉁퉁 붓는 것 외에 힘든 일이 없었으나 연노랑 투피스와 새빨간 립스틱,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자동인형처럼 입에 걸어야 하는 미소가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도도와 나의 시간표는 엇갈려 짜여 있었다. 2시간 근무, 1시간 휴식이 원칙이라 도도와 나는 교대로 휴식에 들어갔다. 전일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후조는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근무였다. 오랫동안 일한 도도가 전일조, 이제 막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내가 오후조였다.      


1시간쯤 함께 근무를 설 때도 있었으나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됐다. 우리는 서로의 연노랑을 곁눈질하며 데스크에 나란히 서 있었다. 회전문이 돌아갈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며. 도도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나는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퇴근했다.        


        

“그러니까 너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야. 내가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넌 내가 우습니? 내가 그렇게 만만해?”                



일이 끝나 지하1층 직원휴게실로 내려가면 늘 도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도는 항상 화가 나 있었고, 매번 비슷한 대사로 상대방을 나무랐다. 험악한 욕설을 쏟아낼 때도 있었고 제3자인 내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비아냥거리며 상대를 조롱할 때도 많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도도는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은 채 휴게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앉아있다기보다 뭐랄까, 당장이라도 앞으로 튕겨나갈 것 같은 포즈로, 약이 바짝 올라 털을 곧추세운 고양이 같은 어깻죽지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끈질기게 싸울 수 있을까.           



나는 도도를 볼 때마다 그것이 신기했다. 매일 매순간 저토록 강렬한 감정을 쏟아내고도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니. 도도는 근무 중간 휴식시간도 온전히 싸우는 데만 사용한다고 했다. 간단히 요기를 하거나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뭉친 다리를 푸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핸드폰만 들고 소리친다고. 그러다가도 타임이 울리면 옷매무새를 고치고 립스틱을 덧바른 뒤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주차, 보안요원들과 함께 쓰는 공동휴게실이라 종종 항의가 들어왔다)         


 

“온도, 호떡 먹을래?”           



가방을 들고 휴게실을 나설라치면 늘 도도가 나를 불렀다. 한 시간 내내 소리친 도도의 목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도도는 정수기 물을 몇 번이나 따라 마신 뒤 앞장서 걸었다. S생명 건물 앞 버스정류장에는 호떡과 떡볶이, 어묵 등을 파는 푸드트럭이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나는 호떡을, 도도는 어묵을 먹었다.             


   

“그 새끼랑 이번에 안 헤어지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저번에도 그 말 했어요, 언니.”

“그래, 그래서 그 때 헤어졌잖아.”

“그러곤 다시 만났잖아요.”     


“아, 몰라. 이번엔 진짜, 진짜 헤어진다고.”            


    

나는 도도가 싫진 않았지만 그녀의 이별 선언에는 좀 물리는 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도도는 매일같이 이별을 결심하고(실제로 이별을 선언하고) 매일같이 다시 만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녀의 분노에 심드렁해졌는데, 오늘 벼락같이 토해낸 감정이 사흘 내로 틀림없이 반복 재생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또 뭔데요?”

“클럽 안 간다고 분명히 나랑 약속했거든. 근데 그 새끼 어제 나한테 거짓말하고 새벽까지 놀러 다녔어, 정확하게 핫플만 찍고 다니셨더라고, 아주.”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요?”

“뭘 어떻게 알아, SNS에 완전 도배를 해놨는데.”           



도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술과 클럽에 환장한 양아치’였고 ‘주변에 기집애들이 끝없이 몰려드는 바람둥이’ 타입이었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고 했다. 옆에서 보기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허세 넘치는 낭비적 인간 정도로 보였다.           



“이거 봐, 여기 있는 애 저번에 그 기집애야. 모르는 애라고 딱 잡아떼더니 이거 완전 썸타는 분위기지, 아님 누가 이렇게 붙안고 사진을 찍어?”          


 

내게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도도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아파보였다. 내가 얘 SNS도 다 뒤져봤어, 아주 클럽에서 사는 애더라고. 도도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SNS를 열어 보여주는 동안 나는 호떡을 다 먹고 어묵국물로 입가심을 했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버스정류장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어깨를 풀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서는 버스를 향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온도 네가 보기엔 어때? 바람 맞지? 어떻게 봐도 바람이지?”

“글쎄요.”

“딱 봐도 알겠는데 뭐가 글쎄요야. 이 새끼 누가 봐도 바람인데 딱 잡아떼고, 나를 의처증 환자 취급이나 하고 말이야.”      


“그럼 이번엔 꼭 성공해요. 난 갈게요.”           



다가오는 파란색 버스를 향해 나는 뛰기 시작했다.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우르르 버스 앞문을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어깨를 단단히 펼치고 튕겨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보니 도도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휴게실 사람들의 항의가 소극적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로비에서의 연노랑 도도는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며 잘 웃었다. 지하1층의 도도는 신경질적이고 새된 목소리를 내며 분에 못 이겨 쓰레기통이나 테이블 다리 같은 것을 걷어차곤 했다.           



“또 거짓말이야?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또 거짓말이냐고!” 



도도의 연인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간에 도도의 반응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도도는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아무렇게나 테이블에 엎드려 울다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함부로 욕설을 퍼붓곤 했다. 온도, 퇴근하고 나랑 술 마시러 갈래? 도도가 물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일상의 도도도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술을 마시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퇴근준비를 하러 내려갔는데 팀장이 도도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니 말대로 그 자식이 양아치에 쓰레기면, 도대체 왜 헤어지질 않는 거야?”           

    


팀장은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도도가 아르바이트인 나와 달리 정식계약서를 쓴 파견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팀장 입장에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도도의 히스테리가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도는 안내데스크에서도 몰래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지적을 받곤 했다.          



“헤어질 수가 없어요.”

“왜 못 헤어져?”


“걔 없이 내가 살지를 못해요. 작년에 진짜 각오하고 헤어졌다가 내내 술만 마셔서 응급실 실려 간 적도 있어요. 사람처럼 살 수가 없어요, 걔가 없으면. 걔도 그걸 아니까 나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고 거짓말하고……”          



이야기는 내가 끝없이 반복해 들었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 자식은 쓰레기야. 근데 걔가 없으면 내가 사람처럼 살 수가 없어. 나는 걔밖에 없는데, 나는 걔 없음 껍데기밖에 안 남는데 걔가 나한테 어떻게 그래. 나는 그것이 처절한 사랑고백으론 들리지 않았다. 낡고 병들어 질기고 쓸모없어진 집착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언니. 언니한테는 이별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갈아입은 유니폼을 빨아올 작정으로 가방에 밀어 넣고 있는데 도도가 탈의실로 들어왔다. 팀장은 돌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팀장은 똑같은 얘기를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들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연노랑 챙모자를 탈탈 털어 캐비닛에 넣었다. 환하고 산뜻한 색의 겉면과 달리 모자 안쪽은 땀과 화장품 때문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치 도도처럼, 도도의 변질되어버린 사랑처럼.               



“언니한테 필요한 건 치료예요.”                



언니한테 필요한 건 그 사람도이별도 아닌 치료예요언니 스스로를 돌볼 힘이에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도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눈으로는 휴대폰을 쏘아보고 있었다. 도도에게 가 닿기에 내 목소리가 너무 작고 자신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도도가 불편하고 무서웠으니까.      



나는 캐비닛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잠금쇠 걸리는 소리가 적막을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도도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다 말고 멈춰 있었다. 호떡도, 술도 권할 것 같지 않아 나는 그대로 탈의실을 나섰다.          


     






처음엔 분명 그가 도도를 망가뜨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도 더는 망가지고 싶지 않아 이별을 선택했을 것이고. 그러나 이별이 불가능했다는 도도의 말은 틀렸다.           



이별은 단번에 무언가를 회복시켜 주는 만능키가 아니다. 
이별은 더 이상의 붕괴를 막아줄 뿐 이미 붕괴된 것들을 치유해줄 순 없다. 
이별 후 나를 재건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일시정지 버튼처럼, 그 자리에 멈춰 최소한의 방어를 하는 것이 이별이라고 도도에게 말했어야 했다. 이별까지의 과정만큼이나 이별 이후의 시간들이 중요하다고. 이별 버튼이 눌린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망가진 것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라고.      


그러나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안내데스크에는 도도가 없었다. 새로 파견된 연노랑 병아리가 나를 향해 상냥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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