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이별생활 (10)
이상하긴 했다. 나는 왜 만도와 만나기만 하면 피곤해질까.
솔직히 말해 만도와의 만남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만도와는 함께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셨는데, 그와 헤어져 집에 돌아올 때면 극도의 피로감이 나를 덮쳤다. 뇌가 퉁퉁 부은 것처럼 감각이 사라질 때도 있었고, 종일 질긴 오징어를 씹은 것처럼 턱관절이 뻣뻣해질 때도 있었다.
“넌 요즘 어떻게 지내?”
만도는 나를 만나자마자 그렇게 묻곤 했다. 나는 늘 무슨 일인가가 있었고 그 일은 대개 억울하거나 서러운 일이었다. 무턱대고 동정 받는 건 싫었기 때문에 나는 말끝마다 ‘다들 그렇게 살지, 뭐’라며 불행을 일반화시켰다. 그러면 만도는 벼락같이 나를 혼내곤 했다.
“야, 그 정도로 시무룩할 일이야? 앞으로 겪게 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온도 너는 말이야,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게 문제야.”
그랬다. 저게 그 극한피로의 원흉이었다. ‘온도 너는 말이야.’ ‘너는 왜 그만큼밖에 노력을 안 해?’ ‘네 그 안일한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니까.’
만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만도처럼 나이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만도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졸업해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삶이었다. 만도의 회사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40분 거리였는데, 러시아워에 시달리는 딸이 안타깝다며 만도의 부모가 차를 한 대 뽑아주었다. 만도는 같이 취업준비를 해 마찬가지로 서울에 있는 중소기업에 입사한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와 함께 적금을 붓고 있었다. 결혼할 때 전세자금으로 쓰려고? 내가 묻자 만도는 이렇게 말했다.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쭉 돌아볼까 해서 모아두는 거야. 오빠네 부모님이 오빠 명의로 일산에 분양받아둔 아파트가 있어서, 결혼하면 아마 거기로 들어가서 살 걸?”
나는 만도가 부러웠다.
나는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자랐고, 기를 쓰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긴 했지만 왕복 네 시간에 걸쳐 통학해야 했다. 당시 학교 앞 원룸 전세보증금은 5천만 원. 방학과 주말을 아르바이트에 바쳐 용돈, 교통비, 식비를 모두 충당해야 했던 내게는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이었다. 일찌감치 취업이 결정되었지만 회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해 튕겨 나왔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에는 수입이 항상 불안정했다. 어느 해에는 일 년을 꼬박 일해 번 돈이 이백만원뿐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부모의 집에 빌붙어, 부모의 냉장고를 털어먹으며 살고 있었다.
누가 누구더러 온실 속 화초라는 건지. 나는 실소를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물론 만도에겐 내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물적 근성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풍요로움이 인생의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인생의 상당 부분을 매끄럽게 흘러가게 해 준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만도는 거침없고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자신의 주머니 속 돈을 헤아릴 필요 없는 사람들의, 낡고 구멍 뚫린 자존심을 숨겨야할 필요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왔다.
만도와 나의 대화가 기형적인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만도는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그늘이 드리워지면 그것에 대해 가차 없이 떠들어댔다. 반대로 나는 내 구차한 삶이나 궁색한 형편을 들키기 싫어 대부분의 이야기를 삼켰다.
그래서인지 만도는 나의 형편을 오해할 때가 많았다. 처음엔 그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고,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만도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방학이 끝날 때마다 만도는 파노라마에 가까운 해외여행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동남아패키지여행조차 가본 적 없이 늘 아르바이트 매장에서 방학을 보냈다. 만도가 면세점에서 산 가방이며 화장품을 매일같이 바꿔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두꺼운 방수천으로 된 백팩 하나로 사계절을 버텼다. 학과 내 사람들이 가방 모서리만 보고도 온도 가방이다, 하며 집어들 정도였다.
가난까지는 모르더라도 자신처럼 풍족치 않다는 사실은 알았어야 하지 않나?
아니, 그냥 만도의 사전에는 가난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뿐인가?
그저 그것뿐이었다면 나는 만도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만도가 부러웠지만 그녀와 나의 삶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내가 만도일 수 없듯이 그녀가 나일 수 없고, 내가 만도의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럴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다른 것. 나는 그렇게 정리하려 했다.
“온도, 요즘 어떻게 지내? 지난번 정부지원사업 원서 넣는다던 건 잘 됐어?”
“아, 그거…… 잘 안 됐어.”
“그럴 줄 알았어. 온도 너는 다 좋은데 임팩트가 없잖아.”
만도가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는 말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넌 워낙 인상이 희미했어. 레포트는 곧잘 쓰면서 프리젠테이션은 별로였잖아? 나는 말이지, 요약본만 읽고도 엄청 뻔뻔하게 전문가인 척 발표했다고. 몰라도 아는 척, 아는 건 통달한 척 해야 상대한테 먹힐까 말까인데 온도 너는 너무 겸손해. 왜 맨날 그렇게 주눅 든 사람처럼 있는 거야?”
“온도, 요즘은 어때? 마감은 맞췄어?”
“그쪽에서 기한을 너무 촉박하게 주는 바람에 고생했지, 뭐. 이틀 연장 받아서 가까스로 끝냈어.”
“난 그런 사람이랑 일하기 싫던데.”
만도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마감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제 때 일을 못 넘기면 그 다음 사람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는다고. 그쪽도 지금까지의 노하우가 있으니 기한설정을 했을 텐데 왜 그걸 못 맞춰? 좀 빠릿빠릿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여야지. 옆에서 보면 온도 넌 고지식하고 구태의연하게 일하는 버릇이 있어. 요즘 누가 외주주면서 성실함을 기대해? 눈치껏 요령껏 스피디하게 능력을 보여야지.”
“온도, 어떻게 지내길래 얼굴이 그래? 엉망이네.”
“그래? 나 실연당한 티 나? 하하.”
“그 사람이랑 기어코 헤어졌어?”
만도가 마시던 커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너는 왜 그렇게 애가 뭘 하든 흐리멍덩해. 진짜 그 남자를 잡고 싶었음 너도 뭐든 희생할 각오를 했어야지. 나 대학 때 남친이랑 독일로 도망갔던 거 기억 안나? 어학연수니 뭐니 했지만 사실은 그냥 휴학하고 그 나라 가서 남친이랑 산 거야. 그 정도 해버리니까 우리 부모님 반대고 뭐고 절대 안 하잖아. 넌 어떻게 사랑까지 그렇게 계산적으로, 하나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만 하니.”
만도와 함께 있으면 나는 주눅 든 인간, 무능하고 고지식한 인간, 사랑에조차 적극적이지 못한 비겁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점점 더 많은 말을 삼키게 되었다. 만도의 기준에 맞춘, 조언을 가장한 호통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만도는 말했다.
“온도야, 이건 너를 위해 하는 얘기니까 기분나빠하지 말고 들어. 가끔 널 보면 말이지, 너무 답답하단 생각이 들어. 생활반경이 너무 좁아서 식견이 덩달아 좁아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처럼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살아서 무슨 득이 있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늦지 않았으니까?”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면 어때?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따는 거야. 공부가 싫으면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 와. 일이 년,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오면 너도 변할 수 있을 거야. 지금대로라면 너는 그냥 박음질하듯 매일을 살아가는 것뿐이잖아.”
“박음질하듯 살아가면 안 되는 거야?”
“에이, 그건 너무 한심하지.”
말하지 말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말지. 박음질하듯 사는 게 최선인 사람도 있는 건데. 박음질하듯 촘촘히, 매일을 근근이 살아가는 게 보람인 사람도 있는 건데. 대놓고 그런 건 의미 없다고, 한심한 거라고 말하지 말지.
너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일상을, 그렇게까지 비하하진 말지.
나는 만도의 얘기를 들으며(사실은 어떤 얘기도 귀에 담지 않고 그저 듣는 척 흉내를 내며) 생각했다. 지금껏 내가 만도와 만나왔던 건 내가 만도를 좋아해서는 아닌 것 같다고. 어쩌면 나는 만도보다 가난할지언정 자격지심은 없는 인간이라 증명하고 싶단 욕심에 무리해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만도는 만도의 일상을 산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상을 산다.
나는 박음질하듯 매일매일을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만도가 내 일상의 한 땀을 차지하는 일은 더 이상 없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