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조각
겨울방학을 하루 앞둔 12월의 어느 날, OOO초등학교 6학년 4반 교실엔 50여 명의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언가 집중하고 있었다. 초록색 칠판엔 하얀색 분필로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가 적혀 있었다. 교실 한가운데, 철제 보호망 속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는 아이들의 상기된 얼굴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시끄럽기로 소문난 아이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술가가 된 듯 진지하게 미적 감각을 펼치고 있었다. 단 한 아이만 제외하고.
열두 살의 어린 J는 옆 분단의 남자아이 W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 때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이내, 그가 만드는 카드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고개를 제어할 힘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크리스마스 카드는 잊힌 지 오래였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그가 만드는 카드의 주인공에 쏠렸다. 그렇다. W는 J의 첫사랑이었다.
모든 청춘 영화가 그러하듯, 처음 J는 W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볼 때마다 불쾌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장난기 어린 큰 눈과 깊게 파인 보조개, 큰 키의 그는 존재 자체로 빛이 났다. 그 빛남이 이유 없이 거슬렸다.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그녀의 하루 목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그녀는 남녀 부반장이 되었고, 그 목표는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자, 남녀 학생이 모두 홀수니까 짝이 안 맞네. 한 명씩만 남녀가 같이 앉으면 어때?"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녀 머릿속에 W의 얼굴이 동그랗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순간 그녀는 당황했지만, 곧 답을 찾았다. 그건, 그만큼 그와 짝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결단코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설명을 마친 선생님이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J와 W가 같이 앉으면 되겠다. 자리 옮겨볼래?"
J의 짝꿍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W가 그녀의 옆 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녀 인생에 찾아온 첫 시련이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앞만 바라봤다. 그녀는 되도록 옆을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깊게 파인 그의 보조개가 왼쪽 시야에 아른거렸다. '세상에! 이게 진짜일 리 없어!' 둘을 향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한없이 커져갔고, 그녀의 얼굴은 폭발을 앞둔 활화산처럼 울그락불그락 피어올랐다.
J는 W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색한 대화가 간간이 이어질 즈음, 반장 O가 아이들을 본인의 집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큰 눈과 화려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O는 유명 브랜드 옷과 단정한 헤어 스타일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우리가 현관에서 이름을 부르면, O는 미스코리아처럼 우아하게 나무 난간을 잡으며 1층으로 내려오곤 했다. 활달한 O는 W와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장난 섞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때면, J는 땅 속 깊이 꺼지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W의 보조개가 깊어질수록 그를 향한 J의 혐오감은 더욱 짙어졌다. '쳇!' 어느새, 속으로 되뇌던 단어들이 그녀의 입술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J가 W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J야. 넌 W가 그렇게 싫어?"
"정말, 너무 싫어. 보기만 해도 너무 싫어!"
J가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사이, W가 옆을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찮아. 사실인데 뭐. 싫어하는 것 맞잖아.' 친구들과 활짝 웃다가도 그가 지나갈 때면, 그녀는 꽁꽁 얼어붙었다.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려는 듯, 그녀는 그 앞에서 더욱 차가운 얼음이 되었다. 그러나 점심시간, 창 밖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창 밖을 한 번 볼까? 아니야,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애타는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의 마음은 단단한 얼음에서 물이 된 지 오래였다. 급기야 끓는점마저 넘어섰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의 흐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J와 W, O는 수업을 마치고 학급 일을 의논하기 위해 교실에 남았다. 회의를 마치고 W와 O가 함께 교실을 나가던 찰나, J는 불현듯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에게 건넨 차가운 눈빛과 말투를 그의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내고 싶었다. 열두 살 인생에서 처음 마주한 깊은 후회였다. 그러나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녀는 관계에 서툰 열두 살, 초등학생일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미성숙한.
다시, 열기로 후끈거리는 미술시간이다. J는 여전히, 건조하지만 아련한 눈빛으로 W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검은색 하드보드지를 직사각형으로 자르고 가운데를 접어 카드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하얀색 종이에 꽃을 그려 오려낸 후, 그 종이를 검은 하드보드지에 붙였다. 그러자 비어 있는 부분으로 검은색 꽃이 선명하게 피어났다. '저 카드의 주인공은 O일 거야!'
미술 시간이 끝나고 방학식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건강하게 보내란 당부를 덧붙이며 식을 마무리했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은 크게 소리치며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갔다. 의기소침한 채 가방을 정리하던 J에게 W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넨 후 사라졌다. 당황한 그녀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나에게 준거지?'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래 가며 그녀는 조심스레 카드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카드를 읽어 내려갔다. 카드 어디에도 수신인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또박또박 쓰인 글자 속에서 숙녀라는 단어가 툭 튀어 올랐다. 그녀의 기쁨은, 카드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닐 것이란 확신 속에 급속히 고꾸라졌다.
'숙녀? 나보고 숙녀라고 할 리 없잖아. 숙녀가 될 리도 없고. 난 빛나지 않는 검은 별 같은 존재라고. 이건 날 위한 카드일리 없어. 분명 O를 주려다 부끄러워서 나에게 준 걸 거야!'
카드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가방을 멘 채, J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카드를 읽고 또 읽었다. 본인의 것이 아니라 믿었지만 카드를 버릴 순 없었다. 그건 W의 손길이었다. 그녀는 서랍을 뒤져 자신이 가진 가장 예쁜 봉투를 찾았다. 그리곤 카드를 소중히 감쌌다. '내가 이 카드의 진정한 주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J의 초등학교 마지막 방학은 그렇게 후회로 시작되었다.
다음 이야기는, 거짓말처럼 J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다음 해 2월 J와 W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배정된 중학교에 입학했다. 가끔 OOO중학교 교복을 볼 때마다, 그녀는 그를 떠올렸다. 주인을 잃은 카드와 함께. 그럴 때면, 내면 깊숙이 욱여넣었던 열등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는 열등감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카드의 의미를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본인이 카드의 주인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이다. 본인임을 확인하는 것보다 자신이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열등감으로 범벅이 된 J의 첫사랑은 모든 사랑 앞에서 그녀를 작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카드의 주인공이 아니면 어쩌지?' 20대가 되어 몇 번의 사랑에 실패한 후, 그녀는 오랜만에 핑크색 봉투에 싸인 W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발견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카드는 여전히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결국 그녀는, 열등감을 이기지 못한 채 그 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금 J의 머릿속엔, 아쉽게도, 숙녀라는 단어 외엔 아무것도 자리한 게 없다.
'만약 그 카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흘러갔을까?'
가끔 J는 이런 공상에 빠지곤 한다. W를 향한 불편한 감정을 호감으로 이해했다면, 자신의 진심을 확인하고 행동에 변화를 주었다면, 어쩌면 그녀의 자기 충족적 예언은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믿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으며,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진심을 받아들일 자격이 그녀에겐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마지막 방학을 앞둔 미술시간은, 그래서 J의 한없이 후회스러운 찰나의 조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