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수기와 쓰레기

다섯 번째 조각

by 진언

199X년 4월의 어느 월요일, 열세 살의 J가 방금 버스에서 내렸다. 저 멀리 OO중학교가 시야에 들어왔다. 등굣길이었다. '치익-' 그녀는 발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월요일, HR(Homeroom)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중학생이 된 지 2개월이 되었지만, 중학교 학급회의엔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휴우-' 한 차례 숨을 내뱉고 그녀는 다시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J의 학교는 그해 새로 문을 연 학교였다. 남녀공학이 드물던 시절, 인근에 처음 들어선 남녀공학이었다. 첫 등교날, 아이들은 공사 현장을 피해 질퍽한 바닥을 조심스레 밟으며 운동장에 모였다. 학기 초엔 체육시간마다 운동장 가득 쌓여 있던 벽돌을 다 같이 나르기도 했다. 당시 학교는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그랬다.




'따-다다다-따-다다' 종소리가 복도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HR시간이 시작되었다. "자, 시작하자."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단호하게 들렸다. J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교탁 앞에 섰다. 50여 명 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녀의 왼쪽 시야로 팔짱을 낀 선생님의 몸짓이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J는 HR시간을 이끌어야 할 반장이었다.


"오늘은 OO안건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의견 있는 친구 있을까요?"


J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 듯 움직였다. 아이들의 고개는 순식간에 책상으로 향했다. 선생님의 경직된 몸짓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담임 선생님은 임용고시를 마치고 처음 교편을 잡은 신임 교사였다. 새내기 교사의 열정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격식을 갖춘 회의 형식도 민주적인 교실을 원하는 선생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막 초등학생 딱지를 뗀 아이들은 민주주의보단 새로운 삶의 적응이 먼저였다.


"그렇다면, 안건에 대한 찬반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찬성하는 친구 손 들어주세요." 긴장한 아이들의 손이 하나 둘 책상 위로 올라왔다. J는 속으로 빠르게 숫자를 세었다. "그럼 반대하는 친구 손 들어주세요." 이번에도 재빨리 숫자를 셌다. "그럼 찬성이 과반이므로, 이 안건을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끝내고 조심스레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차가운 정적 앞에 아이들의 동공도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들, 거수기니?"


J는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교탁 아래 숨긴 손가락을 하염없이 꼼지락거렸지만, 불안감은 줄지 않았다. 정적을 깨고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다음 회의에선 각자 의견을 내. 손만 올리지 말고. 알겠지?"


'따-다다다-따-다다' 고마운 종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문으로 향하던 선생님이 뒤돌아 J에게 다가왔다. "J야, 이건 회의야. 아이들이 의견을 내도록 네가 이끌어야지. 그게 반장의 역할이야." "네." J는 힘없이 자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쉬는 시간이었다. J는 다시 칠판 우측으로 향했다. 이제는 '떠든 사람' 명단에 아이들 이름을 적어야 했다. 그 순간, 학생주임이 두꺼운 막대기를 들고 복도를 지나갔다. "얘들아, 조용히 하자. 이러다 또 혼나." J의 목소리는 웅성거리는 아이들 소리에 닿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때, 학생주임이 눈을 매섭게 뜨며 1학년 6반 교실로 들어섰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조용히 안 해? 반장, 단속 안 하고 뭐 해?"


고함에 놀란 J가 떠든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자, 아이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고개를 떨궜다. 학생주임은 매서운 눈빛으로 교실을 한 바퀴 할퀸 후 나가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작은 소리들이 여기저기 새어 나왔다. '제발, 3분만 버티자.' 그녀는 힘없이 시계를 바라봤다. '쉬는 시간이 안 왔으면 좋겠어, 제발!' 10분의 휴식 시간은 열세 살 아이의 숨통을 조여왔다. 신생 학교의 명성을 확립하려는 선생님들에게 반장은 압박을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




'따-다다다-따-다다'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고 청소 시간이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들은 책상을 뒤로 밀고 빈 공간을 쓸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책상을 앞으로 밀어 교실 뒤편 청소를 이어갔다. 일사불란했다. 청소를 마친 아이들은 또다시 침묵을 유지한 채 학생주임의 생활 지도를 기다렸다. '탁-탁-탁' 옆 반에서 들려오는 학생주임의 막대기 소리에 아이들은 일순간 얼음이 되었다. 이제 J반 차례였다.


학생주임은, 마치 호랑이가 토끼 굴을 염탐하듯, 빠르게 바닥 쓰레기를 훑었다. '탁-탁' 학생주임이 한 아이 앞에 멈췄다. "이름이 뭐야?" 학생주임은 아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응시하며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다시 움직이며 토끼들 주변에 남겨진 쓰레기를 샅샅이 뒤졌다. "또 쓰레기 나오면 모두 입에 넣어버린다. 알겠지?" 조용한 교실 안, 호랑이의 으르렁 소리가 쩌렁쩌렁 퍼졌다. 언젠가 학생주임이 아이들 입에 쓰레기를 넣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흠칫 놀란 J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학생주임이 나가자마자 풍선 바람 빠지듯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자자! 오늘 떠든 학생과 청소 시간에 이름 적힌 학생들 모두 운동장으로 모인다!"


학생주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왔다. "아아, 진짜!" 지목된 아이들은 짜증을 내며 일어섰고, 하루를 무사히 버틴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J는 집에 가지 못한 채 교실에 남아 있었다. 그날은 특히 불려 간 아이들이 많았다. 그녀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창문 밖 아이들은 학생주임의 구령에 맞춰 오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얼마 후 저 멀리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소리의 주인공들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팍-' 한 아이가 교실을 들어서자마자 책상다리를 걷어찼다. 그리곤 책상 위 가방을 낚아 채 교실을 나가버렸다. J는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나간 뒤 그녀는 홀로 교실을 나왔다. 버스도 잊은 채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울음 섞인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내일은 또 어떻게 하지?" 열세 살 아이의 대성통곡이 작은 인도에 가득 찼다.


집에 도착한 J는 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며칠 전 책상 서랍에 숨겨 둔 종이 한 장을 떠올렸다. 청소년 상담전화번호였다. 그녀는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띠이-익, 띠이-익! 안녕하세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어른의 목소리. 놀란 그녀는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말한다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크게 한숨을 쉰 후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한없이 작고 초라한 아이가 보였다. 담임의 단호한 눈빛도, 학생주임의 날카로운 목소리도, 아이들의 차가운 시선도 이 작은 아이가 그대로 받아냈다. 그 아이는 거수기였고, 또 쓰레기였다. 순간, 그녀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날카롭게 스쳐갔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난 절대 유관순은 못됐을 거야.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었겠지. 비겁하게!'


이제 막 어린이에서 벗어난 J는 청소년에게 주어진 사회적 압박과 책임감 앞에 처음으로 무력감을 맛봤다. 싱그러워야 할 열세 살의 4월은 그녀에게 유난히 쌀쌀한 찰나의 조각을 남겼다.

이전 04화착한 아이 콤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