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위교육장

여섯 번째 조각

by 진언

"딸깍, 딸깍, 딸깍…"


J는 교차로에서 방향지시등 레버를 올린 채 보행 신호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릴없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왼쪽 건물 명판에 시선이 닿았다. 민방위교육장, 딱딱한 글씨체가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곧 신호가 바뀌었고 그녀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 그녀의 마음은 199X년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로 향하고 있었다.




"J야, 이리 좀 와봐."


점심시간, 선생님의 부름에 열두 살 J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평소 선생님의 얼굴은 활짝 웃거나 매섭게 노려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쉽게도 그녀는 후자의 얼굴과 자주 마주했다. 어깨가 한껏 솟구친 J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오늘 오후에 민방위교육장에서 학부모 교육이 있을 거야. 어머니 참석하시라고 말씀 전해드려."

"아... 저희 엄마가 가게에 계셔서 오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부반장 어머니가 학급 활동에 이렇게 참여를 안 하시면 어떡하니?"

"그러면... 전화드려볼게요."


선생님의 매서운 눈빛에 긴장한 J는 서둘러 교실을 나와 가까운 공중전화기에 도착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을 풀어주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엄마, 오늘 오후 2시에 학교 옆 민방위교육장에서 학부모 교육이 있대. 올 수 있어?"

"오늘? 아빠도 안 계셔서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엄마, 안 되면 안 되는데... 엄마, 그냥 가게 비우고 오면 안 돼?"

"어떻게 그래, 선생님한테 안 된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그녀는 풀이 죽은 채 교실로 돌아왔다. 선생님을 보자 작은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곤 천천히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엄마가... 가게에 아무도 없어서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안 돼, 이번엔 오시라고 해. 오시는 걸로 안다. 알겠지?"




마음이 급해진 J는 교실을 뛰쳐나와 다시 공중전화기로 향했다. 순식간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엄마! 엄마, 안 오면 안 될 것 같아. 꼭 와야 된대!"

"J야, 오늘은 정말 안 돼. 이따가 손님이 오시기로 했단 말이야."

"아, 몰라! 몰라!! 그냥 와, 꼭 와야 해, 알았지?"


J는 어머니의 응답도 듣지 않은 채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선생님은 평소 학교를 자주 찾지 않는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반장의 어머니는 학교 육성회장이었다. 당시 육성회장은 교사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힘이 있었다. 더구나 전업주부였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학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어린 J의 눈에, 반장 어머니는 선생님과 대등한 위치로 보였다. 화려한 의상과 꼿꼿한 자세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반장 어머니가 학교에 방문하는 날이면, 선생님은 J에게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섬세한 J는 그게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J는 육성회나 어머니회가 열리는 날이 특히 부담스러웠다.




J는 오후 수업 내내 입 안의 텁텁함을 느꼈다. 선생님의 눈과 피하고, 어머니의 참석 여부를 걱정하느라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자 그녀는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 앞에 다다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발, 아무도 없기를! 제발, 닫혀 있어라!'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통유리 너머로 어머니의 파마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게 문을 강하게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엄마! 왜 안 갔어? 여기 있으면 어떡해!!!"

"엄마가 못 간다고 얘기했잖아. 손님이 방금 가셨단 말이야. 어떻게 선약을 깨니?"

"엄마, 정말 너무해!!!!!!!!"


그녀는 목청이 찢어져라 울분을 터트리며 가게를 뛰쳐나왔다. 그녀의 예감이 맞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예감이 엇나가길 기도했다. 자영업자였던 부모님은 일주일 내내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문을 닫는 날은 설날과 추석 명절뿐이었다. 그마저도 귀향에 온 에너지를 뺏기느라 제대로 쉬어 본 적 없는 부모님이었다. 어린 J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운함을 떨쳐낼 순 없었다. 내일 선생님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해야 하는 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드르륵-'


다음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표정한 선생님이 J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어젯밤 이야기로 왁자지껄 수다 삼매경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가방을 걸고 자리에 앉았다. 수업 직전, 드디어 선생님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자연스레 두 손을 포갠 채 선생님 책상 앞에 섰다.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어제 어머니 안 오셨더라. 어떻게 내 말을 무시할 수가 있니. 1교시 끝날 때까지 뒤에 서 있어."


아이들의 시선이 교실 뒤 편으로 걸어가는 J를 향했다. 아이들 무리 속 웅성거림이 전해졌다. 그녀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떨궜다. 곧이어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이 시작되자, 그녀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아이들의 시선이 칠판을 향한 틈을 타, 재빨리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다시 뒷짐을 지었다. 순간 그녀 뇌리 속에 어머니의 허름한 옷이 스쳤다. 매번 바쁘게 뛰어다니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나 지금,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건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열두 살 J 인생에 처음 마주한 수치심이었다. 정작 선생님의 홀대엔 아무 말 못 하면서, 그 원인을 어머니에게 돌리는 비겁한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비겁함에 짓눌려 돌처럼 굳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그녀 자리로 몰려들었다. 이유를 묻는 친구들에게 J는 끝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 말을 전하다, 선생님의 그 눈빛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웠다. 한 편으론 친구들이 어머니를 탓할까 봐 겁이 났다. 결국 통화를 마무리 짓지 않고 끊어버린 건 자신이었다. 책임을 묻자면 경솔했던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 일 없던 듯 그저 조용히 묻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입을 뗄 수 없게 한 건, 차가운 세상과 조우한 충격이었다. 좋은 성적을 내고 학급 생활에 열정적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언제라도 교실 뒤편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푸르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낯선 세상과 직면한 순간, 그녀는 한없이 작은 자신의 존재를 실감했다. 199X년 어느 날 교실 뒤 편에서 조용히 훔쳤던 눈물은, 그녀의 차가운 찰나의 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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