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콤플렉스

네 번째 조각

by 진언

2017년 8월 어느 일요일 오후, J는 한 후배와 식사 후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 안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서 후배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나 혹시 착한 아이 콤플렉스 아닐까, 선배?"


당시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삶의 경험을 쌓은 성인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일상적 용어가 되어 있었다. J는 후배가 겪은 일들을 천천히 듣고, 그때 감정을 물으며 후배의 상황에 자신을 놓았다. 떨칠 수 없는 답답함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력했겠구나, 그때." 그녀는 쉽게 조언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도 없었지만,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황금률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대신 타인의 감정을 함께 읽었다. 그녀의 한 마디에, 말을 잇던 후배의 눈이 커졌다. "맞아, 딱 그랬어!"




집에 돌아오는 길, 그녀는 세 정거장을 앞두고 버스에서 내렸다. 걷고 싶었다. 머릿속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정작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뒤덮인 사람은 J였다. 그녀는 갈등을 가장 두려워했다. 특히 갈등의 중심에 있을 때, 그녀는 그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안테나는 희미한 조짐의 기운도 쉽게 포착했고, 기민하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러다 갈등이 터지면 바로 수습 모드에 돌입했다. 잘잘못을 가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갈등을 잠재우는 것, 그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녀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누구나 그렇듯, 집에서 태동했다.


J의 어린 시절은 크게 두 배경으로 나뉜다. 조마조마하거나 안심하거나. 조마조마할 땐 온 집안이 붉게 물들고, 안심이 깃들면 온 집안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은은한 파스텔톤은 없었다. 태어나보니, 성격이 확연히 다른 세 사람이 복잡한 심리적 역학 관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 두 살 터울 오빠는 호기심 많은 내성적 아이였다. 반면, 그 시대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아버지에겐 삶에 대한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오빠의 호기심 어린 행동이 그 원칙을 벗어날 때마다, 아버지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엄중했다. 그 단호함은 당사자뿐 아니라, 관찰자인 J도 주눅 들게 했다. 어머니는, 그 시대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참고 인내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썼다. 감정을 돌본다는 건 그 시대 어른에겐 사치였다.


오빠는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꿈을 찾았다. 그리곤 24시간 내내 기타와 한 몸이 되었다. 유순했던 아들이 집념의 예술가로 거듭나자, 부모는 크게 당황했다. 공부=좋은 대학=성공, 이 공식밖에 알지 못했던 그들은 아들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어르고 달래다, 결국 분노가 표출되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반면, J는 그 공식을 따르며 부모를 흡족하게 했다. 그렇게 남매의 성적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안 그래도 내성적인 오빠의 말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온 집안이 붉게 물들 때마다 그녀의 안테나는 사이렌의 볼륨을 더욱 키웠다. '비상! 비상! 비상!' 문제는, 본인의 불안을 추스를 새 없이 가족의 감정 진폭을 어린 그녀가 모두 흡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감정 읽기에 능했던 그녀는 부모의 안타까움도, 오빠의 서글픔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재자 역할을 자처할 때마다 그녀는 불쏘시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부모에겐 오빠가 해주지 못한 역할을 대신하고, 오빠에겐 의지할 수 있는 동생이 되어주는 것. 바로, 착한 아이였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장소가 어디든, <거위의 꿈>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J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가사만 보면, 이 곡은 J가 아닌 오빠의 곡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한 건, 꿈조차 가져본 적 없는 자의 회한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꿈꾸지 못했다. 꿈꾸는 거위를 향한 친인척의 차가운 시선을 옆에서 목도했고, 동시에 부모의 꿈도 대신해야만 했다. 첫 반장이 되던 날, 그리고 처음으로 1등을 했던 날, 부모의 상기된 표정과 넓게 펴진 어깨는 그녀 삶의 지표가 되었다. 학창 시절 내내 그녀는 학급·학교 임원을 놓치지 않았고,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부모에게 건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애교 섞인 표정과 말투로 부모의 고된 하루를 위로하곤 했다. 그녀는 늘 자신보다 가족이 먼저였다. J의 자기 연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걷던 J의 머릿속에 불현듯 두 단어가 떠올랐다. 희생과 선택. 지금껏 그녀는 자신을 희생자 프레임으로 바라봤다. 프레임 속 자신은 짙은 회색빛의 안타까운 아이였다. 순간, 선택이라는 단어가 더욱 커지며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그건 생존을 위한 어린아이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녀에게 오빠는 좋은 모델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부모와 멀어지는지, 오빠는 이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부모와 오빠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어린 그녀의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감지했을 것이다. 지금이 본인에겐 결정적 기회라는 것을. '희생이었다고?',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교만이었다. 또한 불가피한 선택도 아니었다. 모두 자신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아, 나의 선택이었어. 모든 게 결국 나의 선택이었어!'


선택이라는 프레임으로 과거를 돌아보자, J의 마음속 딱딱한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희생자는 없었다. 착한 아이가 모습을 감추자, 강한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씩씩한 딸도, 똑 부러진 딸도, 애교 많은 딸도, 그리고 오빠에게 많은 걸 양보하던 동생도 모두 강한 아이의 선택이었다. 뒷목이 저려왔다. 30년 가까이 품어 온 삶의 지반이 강하게 흔들렸다. 불가피한 희생자에서 주체적인 선택자로 새로운 프레임을 씌우자, 갈라진 틈새로 해방감이 물 밀듯 밀려왔다. 감옥에서 막 탈출한 쇼생크탈출의 앤디처럼, 그녀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은 듯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너는 강한 아이야. 언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모든 게 선택이었음을 이해하면, 자신의 수동성에 대한 비난도 사라질 거야. 그리고 너에게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게 되겠지. 잊지 마, 너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귀뚜라미 선율이 조금씩 들려오던 어느 늦은 여름밤, J의 말을 듣고 있는 건 후배만이 아니었다. 그녀 내면의 어린아이 역시 이를 천천히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날밤 선명하게 땅을 비추던 달빛은, 그렇게 J의 찰나의 조각이 되었다.


◆ Read, Reflect, Write. 읽고 머물고 쓰는 공간으로 초대합니다. hello2bye.notion.site

이전 03화고요한 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