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조각
2018년 O월 O일 금요일 아침, 조용히 눈을 뜬 J는 오늘이 휴가임을 깨닫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가 내길 잘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자신에게 줄 생일 선물을 골랐고, 결국 자신에게 하루를 선물하기로 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자극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띠링,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J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와 애정을 담아 회원님의 기쁜 생일에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카드사에서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였다. 띠링, 또다시 올리는 알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역시나 광고였다. 오늘 그녀의 핸드폰 메시지는 자본주의 축하 인사로 가득 찼다. 띠링, 한 번 더 울리는 알람. 이번엔 지인이었다. 'J야, 오늘 왜 이렇게 졸리니.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다.' 메시지를 읽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 화면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그러게, 나도 졸리다. 남은 하루도 힘내자!' 그리곤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던 찰나, 자신 역시 지인의 생일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젠가 자신의 메시지도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겼을지도 모른다.
J는 카카오톡에 자신의 생일을 비공개로 설정했다. 회사 인트라넷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처음엔 자신의 진심을 오해했다.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담담한 성격이라 믿었다. 하지만 생일마다 찾아오는 무기력감 앞에 그녀는 진심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예기불안이었다. 생일은 한 생명이 세상에 등장한 첫날이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존재를 긍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J는 생일이 시험대 같았다. 축하받지 못할까 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녀는 두려웠다.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멀리하는 것처럼, J는 자신의 생일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타인을 시험했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축하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겐 마음을 열어도 된다고 말이다.
사실, J는 오래전부터 생일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20대엔 J도 시끌벅적한 생일을 맞이하곤 했다. 서리가 하얗게 맺힌 잔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경쾌한 울림 속에서 벅찬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의 반응을 고대하며 친구들이 내민 선물엔,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설렘의 하늘을 날기도 했다. 분명 그런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근원엔 행복이 아닌, 안도감이 있었다. 다시 한번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안정감과 동시에, 1년간 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 일종의 보증서가 되었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언제나 타인의 시선이었다.
침대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7시 요가 레슨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일어서야 했다. 요가원은 그녀 집으로부터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고속도로를 30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핸드폰을 쥔 채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생일인데 가지 말까?' 그렇다고 저녁에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운동 가방을 손에 쥐고 집을 나섰다. 운동을 시작한 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차에 시동을 걸며, J는 요가원을 처음 찾았던 몇 달 전을 떠올렸다. 운동과 멀었던 그녀를 요가원으로 이끈 건, 한동안 지속된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매번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곤 했다. 어떤 날은 난간을 잡으려 사지를 버둥거렸고, 어떤 날은 행인들을 향해 소리치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폭삭 주저앉은 건물처럼, 한 번 넘어지면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끙끙거리다 결국 꿈에서 깨어났다. 당시 그녀의 몸무게는 47kg,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영상 속 아쉬탕가 수련자의 탄탄한 근력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도 강해지고 싶었다.
어느새 J의 차가 요가원 건물 지하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차장엔 공간이 넉넉했다. 그녀는 차를 주차한 후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했다. '누가 생일 저녁에 운동이나 하러 올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유리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즐겁게 운동해야죠!" 에너지 넘치는 선생님의 인사가 뒤이었다. '그래, 이왕 온 거 해보자.'
J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인근 유일의 아쉬탕가 요가원이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퀀스를 반복하며 호흡과 동작을 연결하는 아쉬탕가 요가는 단 한순간의 잡념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그 고됨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던 거울이었다. 이곳에 등록하기 전, 그녀는 집 근처 요가원에서 체험 수업을 진행했다. 벽 전체를 뒤덮은 거울 속엔 수많은 숙련자가 앉아 있었다. '아, 저 사람 몸매 너무 예쁘다. 이 사람은 왜 이리 능숙해, 얼마나 했을까? 어머, 저 옷 브랜드는 뭘까?' 50분 내내 그녀는 온갖 상념과 싸우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자세 교정을 목적으로 설치한 거울이, 그녀에겐 본격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견주는 각축장이 되었던 것이다.
곧바로 J는 오른쪽 가장 앞 줄에 요가 매트를 깔고 자세를 잡았다. 선생님의 구령에 동작을 하나씩 바꿔가며 큰 흐름에 자신을 맡겼다. 동작이 바뀔 때마다 각기 다른 부위의 근육이 깨어났다. 근육의 리듬을 느끼며, 그녀는 신체와 면밀히 소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초보자에게 찾아온 첫 각성이었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닦으며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모든 동작을 마치자, 최종 마무리 동작인 사바사나로 이어졌다. 사바사나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온몸의 긴장을 푸는 휴식 동작이다. 그녀에게 지금껏 사바사나는 짧지만 강렬한 단잠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정신이 맑았다. 눈을 감고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온몸 구석구석을 바라봤다. 미온수가 온 혈관에 퍼지듯, 따뜻함이 몸을 따라 옮겨갔다. 그러자 무겁게 내리누르던 압력이 줄어들며 몸이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했다.
'세상에! 이런 안온감은 처음이야! 이제야 나 자신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 같아!'
그간 안절부절못하며 보냈던 생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타인의 축하에 웃음 짓던 날들, 핸드폰을 확인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섰던 날들, 그 모든 날엔 그녀가 없었다. 차갑게 식은 표정과 영혼 없는 웃음만이 그녀를 맴돌았다. 본질을 잃은 껍데기의 자기기만쇼였을 뿐, 모든 게 헛것이었다. 열기가 식어가는 얼굴 위로 시원한 바람결이 번졌다. 다시 감각으로 돌아온 그녀는 느리게 울려 퍼지는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이제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심장의 작은 외침.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귓가로 흘러 떨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생일은 신의 축복임을, 그리고 그녀가 진정으로 축하받고 싶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음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바빴던 그녀는, 가장 필요했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왼쪽 가슴,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그곳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그리곤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2018년 O월 O일 금요일밤 7시 50분, 그녀는 감사의 눈물로 자신을 위한 첫 생일을 기념했다. 그 찰나의 순간은 J에게 삶의 축복을 알게 한 고마운 조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