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열세 번째 조각

by 진언

199X년 12월의 어느 날, 겨울방학을 맞이한 J는 막내 이모가 살고 있는 청주를 찾았다. 이모는 수능시험을 마친 조카를 위해 속초 깜짝 여행을 준비했다. 그 여행엔 이모의 친구도 동행했다. 때마침 보송보송 내리던 송이눈 덕분에 낙산사의 운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수능 결과에 실망한 그녀는 풍경을 제대로 담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던 길, 생소한 공간에서 낯선 하루를 보낸 그녀는 긴장이 풀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두—두두둥—두—두두둥"


잠결에 익숙한 멜로디가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도입부였다. J는 몽롱한 상태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J가 서태지의 엄청난 팬이었어. 서태지가 은퇴했을 때 밥도 안 먹었던 모양이야. 언니에게 전화가 왔는데, 딸 걱정에 울먹이더라고. 너무 놀랐잖아."


이모는 J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던지, 라디오의 노래를 배경 삼아 대화를 이어갔다. J는 조용히 이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범생이던 J의 첫 일탈, 당시 그녀는 갑작스러운 이별에 식음을 전폐했다. '엄마가 울먹였다니, 생각지도 못했어.' 그때 그녀는 자신의 아픔에만 골몰해 있었다. 자신을 보며 타들어 갔을 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방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을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 위를 스쳐갔다. 멜로디 한 소절이 살을 에듯 아팠던 1996년 1월로 그녀를 데려가고 있었다.




1996년 1월 22일 저녁, J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서태지가 소속사를 통해 은퇴 의사를 표명한 것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방송을 통해 활발히 활동했던 그였기에 더욱 믿지 못했다. 오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정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라는 단어를 앞세우며 수많은 방송사는 그의 은퇴 소식을 이슈화했고, 망연자실 울고 있는 소녀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황급히 이사를 가버린 그의 집 담벼락엔 어린 소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함께 울며 노래를 부르던 그 무리엔 그녀도 있었다.




J가 그를 처음 본 건 어느 신인 등용 프로그램이었다. 뽀얗고 해맑은 얼굴에,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로 등장한 그는 첫눈에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 후 그는 그녀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연예인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연예인만은 아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마주한 그녀에게, 그는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당시 그녀에겐 많은 친구가 있었다. 굴러가는 가랑잎에도 까르르 웃던 순간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과 우울은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다. 밝지 않은 모습에 행여 누군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다. 그는, 그녀가 안전하게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매일 그에게 편지를 썼다. 학교에서 마주한 불편한 일들과 가족 관계에서 발생한 힘겨운 일들을 솔직하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 방송국을 찾진 않았다. 수많은 팬 중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올바른 응원 방식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은퇴 소식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4년이란 긴 시간, 한 번도 그를 가까이 볼 생각을 하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밥도, 물도 들어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어딘가에 홀로 앉아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만으로 마음이 아렸다. 힘든 시간을 버텨왔을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사무치게 싫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의 소식만을 쫓던 J는 결국 그의 집을 찾아 나섰다. 연대 후문에 자리한 그의 집 앞엔 이미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그의 집을 살폈다. 주인을 잃고 온기를 잃어버린 건물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멍하니 근처를 배회하다 작은 벤치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노을이 번져올 때까지 그녀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삶도 온기를 잃은 듯했다. 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수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1996년 1월 31일, 검은 정장을 입은 그가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냈다. 10일 만에 나타난 그는 몹시 야위어 있었다.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냐고, 조금 더 곁에 있으면 안 되겠냐고, 그 어떤 비난도, 호소도 할 수 없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장난기 가득했던 목소리 대신 이별을 알리는 단호한 목소리가 기자회견장을 채웠다. 미리 준비한 발표문을 읽은 후 그는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서둘러 회견장을 떠났다. 지독히도 단호했다. 그 단호함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선언 같았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방적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해 2월은 J의 기억에서 통째로 비어 있었다. 자주 울었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은퇴 후 그의 행적에 혈안이 됐던 방송사는 서서히 그의 존재를 잊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상실감에 허우적거렸다. 어린 나이에 처음 맞이한 이별이었다.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홀연히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별을 예감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혼자 결론을 짓고, 무자비하게 떠나버렸다. 그녀의 진심은 한낱 하찮은 감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온통 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현실을 위로하고, 그의 행복을 빌었다. 버려진 이가 버린 이를 걱정하는 역설 속에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능을 마친 J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중학교 때 짝사랑했던 동창이었다. 그는 수능 전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능이 끝난 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그들은 변하지 않은 서로의 모습에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에도, 메시지에도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혹여 사고가 난 건 아닌지,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그녀는 밤새 걱정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다정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그가 돌연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걱정을 떨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를 수소문했고, 그가 아무 일 없이 대학 생활을 즐기고 있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결국, 잠수 이별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버려진 셈이었다. 이번엔 그 이유마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별을 통보하지 못할,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은퇴 발표 후 서태지를 걱정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상처보다 그의 안위가 먼저였다. 약속 당일, 몇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인 자신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버려진 자신보다, 버린 상대방을 먼저 살폈다.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관계를 망친 게 나라면 어쩌지?'




J는 생애 첫 관계에서 일방적 이별을 연달아 받아들여야 했다. 관계의 상호적 힘을 느끼기 전에 맞이한 이별은, 자신이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내면에 각인시켰다. 그녀의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관계의 시작도, 끝도, 그녀의 결정권 밖에 있었다. 그녀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일방적 관계가 주는 무력감과 상실감에 압도되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 앞에 늘 작아졌다. 주로 회피형 남자들에게 끌렸고, 결말은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그녀는 불안감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결국 그녀는 조금씩 사랑을 내려놓았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엔 평온함이 스며들었다. 자기 비하도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자기애는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작아졌다. 사랑을 놓았던 순간, 어쩌면 그녀는 내면의 성장까지 함께 놓았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내내 그녀를 안타깝게 했다. 다시 1996년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는 버려진 작은 아이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별은 네 잘못만이 아니야. 이별에도 예의가 있거든. 상처받은 너를 먼저 안아줘. 그래야 언젠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지.'


1996년 1월 그녀 앞에 떨궈진 일방적 이별 통보는 그녀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그 찰나의 조각은 J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성장할 기회를 멀어지게 했다. 동시에 내면의 결핍과 직면할 기회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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