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조각
2017년 5월의 어느 월요일, J는 생후 46일 된 팔뚝만 한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기는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날은 오빠 가족이 아래층으로 이사를 온 날이었다. 맞벌이 부부는 천사 같은 아이를 돌봐 줄 또 다른 가족이 필요했다. 모든 이삿날이 그러하듯, 집안은 분주함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정리를 마친 가족들은 즐거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녀는 좀체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꾸 소파 위 평화롭게 잠든 아기 천사에게 향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조카를 품에 안았다. 작은 천사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졌다. '내게도 드디어 조카가 생겼다!'
당시 J의 새언니는 곧 출산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새언니의 직장은 강남에 있었고, 오빠는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운영해야 했다. 반면, 그녀는 주말에 근무하는 대신 월요일과 화요일에 쉬었다. 직장도 상대적으로 가까웠다. 아기 천사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아기 천사는 그렇게, 그녀 삶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J는 7개월 전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3개월간 자그마한 방에서 암흑의 시간을 보낸 후 지난 3월 회사에 복귀했다. 하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과호흡과 울렁거림에 업무 사이사이 필요시 약을 먹어야 했다. 필요시 약은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손을 떨며 약 봉투를 찾을 때마다, 그녀는 한없이 작고 초라한 자신과 마주했다. 약기운이 퍼져 감각이 둔해질 때면,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짜 거지 같다.'
그러나 가련하고 불쌍한 거지는 집에 돌아오면 왕자로 변신했다. 그것도, 아기 천사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왕자였다. 6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힘겨운 하루를 보낸 J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기 바운서에 몸을 기댄 천사가 방긋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아아-악! 우리 OO다!" 방전됐던 그녀의 몸에 전기가 짜르르 흘렀다. 하루 종일 숨어있던 잇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회의 온갖 먼지를 천사에게 옮길 수 없었다. 꼼꼼히 손을 씻은 그녀는 아기 천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어요, 우리 OO?" 천사와 눈을 맞춘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랑해>를 개사한 곡으로, 아기 천사를 위한 헌정곡이었다.
랄랄라랄랄라 랄랄라랄랄라 랄랄라랄랄라 랄랄라
사랑해 우리 OO 정말로 사랑해
고모의 재롱에 조카가 말간 웃음으로 화답했다. J는 세상을 전부 가진 기분이었다. 순간, 웃고 있던 조카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왜요, 우리 OO, 어디 불편해요?" 그녀는 조카의 표정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슬며시 만져 본 천사의 기저귀. "어이쿠, 우리 OO, 찝찝하겠네. 고모가 개운하게 해 줄게요." 그녀는 재빨리 새 기저귀를 챙겼다. 그리곤 포근한 담요 위에 천사를 눕히고 앙증맞은 다리를 조심히 들어 기저귀를 갈았다. 기저귀가 뽀송뽀송한지 천사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J야, OO 배고플 거야!"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J를 불렀다. J는 아기 천사를 보며 물었다. "우리 OO, 밥 먹고 싶어요?" 순하디 순한 천사가 방실방실 웃었다. 그녀는 새언니가 유축해 둔 모유를 꺼내 정성스레 젖병에 담았다. 그리곤 젖병을 살살 흔든 뒤 온도를 체크하고 천사의 입술에 살짝 닿게 했다. 그러자 천사는 작은 입을 벌려 행복한 식사 시간을 맞이했다. 배가 고팠던지, 젖병이 단숨에 비워졌다. 그녀는 식사를 마친 천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곤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고모 손은 약손, 고모 손은 약손!" 고모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작은 천사의 목에서 예상치 못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꺽-' 그녀는 또 한 번 까르르 웃었다.
천사가 그녀의 집에 온 지 50일이 지났다. 휴일을 맞이한 J는 생후 95일 된 아기 천사와 함께 있었다. 포근한 담요 위에 누워 있던 천사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사지를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곤 갑자기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천사는 무거운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린 후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꺄-악! 우리 OO, 드디어 뒤집은 거야? 세상에!!!" 그녀는 부리나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소중한 순간을 근무 중인 새언니와 공유하고 싶었다. 아기 천사는 머리 무게에 못 이겨 계속 휘청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그마한 입은 쉴 새 없이 기분 좋은 옹알이를 늘어놓았다. "우리 OO, 안 힘들어요?" 고모의 질문에 천사가 답했다. "아-후!" 아기 천사의 원맨쇼에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천사의 첫 뒤집기는 1분간 지속되었다.
어느덧, 10개월이 지났다. 돌을 며칠 앞둔 아기 천사는 한 걸음씩 발을 떼며 천천히 세상을 넓혀가고 있었다. 작은 잇몸에는 귀여운 하얀색 유치가 몇 개 자라났다. 천사는 세상의 온갖 존재를 입으로 물며 확인하는 과정을 즐겼다. 특히 J의 손가락을 좋아했다. 넣을 듯 말 듯 다가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천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다녔다. 그리고 2개월 뒤, 천사는 드디어 작은 엉덩이를 흔들며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곤 숨바꼭질 지옥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녀는 천사를 위해 두 번째 헌정곡을 준비했다. 제목부터 천사 같은 <사랑스러워>였다. 아기 천사는 헌정곡을 들으며 집안의 사각지대를 찾아 작은 몸을 숨겼다.
워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워워~ 네가 나의 조카라는 게 자랑스러워
우리 OO 예뻐요 정말 정말 예뻐요
우리 OO를 사랑해요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났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던 아기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옹알거리던 입술은 정확한 단어를 뱉으며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천사의 몸은 더 강해졌고, 웃음소리는 호탕해졌다. 천사가 생일 초에 세 번의 입바람을 부는 동안, J는 천사에게 십여 개의 헌정곡을 바쳤다. 그리고 수백 개의 공룡 이름을 함께 외웠고, 천사의 머리카락도 손수 잘라주었다. 그녀는 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게임을 찾아다녔다. 한글도, 알파벳도 그들에겐 즐거운 게임의 소재였다.
추억이 쌓일수록 J의 핸드폰은 온통 조카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회사에서도 그녀의 눈은 사진 속 조카에 머물렀다. 웃음소리만 떠올려도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조카가 없던 세상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세상은 온통 조카로 뒤덮였다. 그런 그녀에게 오빠와 새언니는 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되려 고마웠던 건 그녀였다. 조카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모성애는 바깥공기를 쐬지 못한 채 잠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적 자신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2020년 4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단잠에 빠졌던 J가 눈을 떴다. 그녀 옆에는 뽀얀 천사가 새근새근 얕을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주위엔 십여 개의 공룡 미니어처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30분 전까지 공룡 촉감 퀴즈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미니어처를 만져 형태만으로 공룡의 이름을 맞히는 게임이었다. 실내 공기가 더웠는지 아기 천사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손으로 조카의 땀을 닦아준 후,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번졌다. "사랑해, OO!" 그녀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정말 사랑이 아닐까?'
그녀는 평소 사랑을 어렵게 생각했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 앞에선 굳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4년 가까이 이 자그마한 존재에 쏟아부은 건 분명 사랑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눈을 보며 아이의 숨결을 느꼈고,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알아차리려 애썼을 뿐이었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마음껏 웃게 해주고 싶었고, 아이가 좋아하는 건, 설령 그것이 수백 개의 공룡 이름일지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또한 건강에 유익한 것들만 챙겨주고 싶었다. 그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를 향한 사랑도 어렵지 않겠는걸!'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조카를 바라봤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되는 게 아닐까?'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튀어 올랐다. 육아(育兒)였다. 기를 육(育)과 아이 아(兒)로 이루어진 단어. 그녀는 아이 아(兒) 자리에 나 아(我)를 넣었다. 그러자 육아가 순식간에 다른 말이 되었다. 육아(育我)는 결국 나를 키우는 일이었다.
'조카에게 쏟았던 무한한 사랑은, 어쩌면 사랑에 굶주렸던 어린 나에게 주는 보답이었을지도 몰라.'
J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생후 46일 된 조카 앞에서 활짝 웃던 그녀가 생후 46일 된 어린 자신으로 변했다. 2살 조카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던 그녀는 어느새 2살의 어린 자신이 되어 있었다. 3살 조카와 숨바꼭질하던 그녀는 3살의 작은 꼬마로, 조금 전 조카와 공룡 놀이를 하던 그녀는 4살의 호기심 많은 여자아이로 변해 있었다. 어린 자신을 마주 보던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새근새근 잠든 조카를 다시 한번 포근하게 안았다. 어쩌면, 어린 자신을 힘껏 안아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2020년 4월 조카를 통해 어린 자신과 마주했던 그 순간, J는 자기애를 향한 용기 있는 첫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