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조각들이 모여

마지막 조각

by 진언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오전 8시, J의 안구 뒤편으로 휘몰아치던 꿈이 갑자기 끊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꿈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암막 블라인드 덕분에 휴일 아침은 여전히 어둠에 싸여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탁상 위 구글 네스트 허브의 화면을 터치했다. 총 수면시간은 8시 9분, 깊은 수면은 23분, 생생한 꿈으로 인도한 램 수면은 2시간 16분에 달했다. 그녀는 발치에 놓인 핸드폰을 끌어와 잠금화면을 해제했다. 그리곤 노션Notion에 들어가 수면시간을 기록했다. '피곤한 이유가 있었군. 또 꿈이었어.' 그녀는 잠시 꿈을 곱씹은 후 노션의 꿈 기록 DB를 열고 어젯밤 꿈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노션 AI는 잠기고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도 척척 알아들었다. 녹음 중지 버튼을 누르자 AI가 빠르게 요약에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작은 핸드폰 화면만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 꿈은 때로는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현재 가진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협과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해몽을 요청하면, 노션 AI는 꿈이 보내는 메시지를 건네주었다. J는 핸드폰을 다시 침대 끝으로 던지곤, 천장을 향해 바로 누웠다. 곧이어 잠겨 있는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 "완벽함, 타협, 융통성... 아침부터 한 대 얻어맞았네." 발치 끝 환하게 켜진 그녀의 핸드폰엔 어젯밤 꿈의 키워드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완벽주의와 통제 욕구, 선택과 책임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불안, 현실과 이상의 괴리.'




10분쯤 지났을까, 머릿속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이젠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헤이, 구글!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오전 8시 20분입니다. 유튜브에서 5분 아침 명상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를 재생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곧이어 조용하고 단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생애 단 하나뿐인 오늘, 특별하고 소중한 오늘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요."


J는 영상 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기지개를 쭉 켜자, 이제야 하루가 시작된 듯했다. 들숨과 날숨이 평화롭게 이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처럼 그녀도 이 특별한 하루를 행복한 날로 선택하고 싶어졌다. 자연스레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영상 속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나마스떼." 그녀도 조용히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J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월요일은 그녀의 휴일이지만, 브런치 작가로선 유일한 작업일이었다. 그날은 <찰나의 조각들이 모여> 연재의 마지막 이야기를 작성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녀의 얼굴을 인식한 노트북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 역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자신의 브런치북을 클릭한 그녀는 열네 편의 이야기-열두 편의 발행글과 두 편의 저장글-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모든 이야기가 펼쳐졌다. 기획 당시 품었던 이야기들을 예정일에 맞춰 차례대로 풀어냈다. 다행이었다. 첫 연재 <나를 만나는 출근길>을 급하게 종료한 후 그녀는 자신의 완주 능력을 내내 의심했다. <찰나의 조각들이 모여>는 자신에게 향했던 의심의 눈초리를 서서히 거두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한구석, 하얀 먼지로 뒤덮인 빛바랜 앨범을 꺼내주었다. 세월에 바랜 사진들은 매주 한 장씩 그녀를 만나며 선명함을 되찾았다. 하얀 종이에 윤곽만 희미하게 그려져 있던 그녀는, 이야기 한 편이 끝날 때마다 한 칸 한 칸이 다양한 색으로 채워지며 조금씩 생기를 더해갔다.




J는 모든 이야기를 다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글에 녹여진 자신은 상당히 멋진 사람이었다. 삶의 작은 순간에도 의미를 찾고 아픔까지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온기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옮겨 자신을 바라봤다. 순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그녀의 전두엽을 강하게 내리쳤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과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분리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했다. 어젯밤 하루 회고도 상사를 향한 불편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자신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임을 그녀는 자꾸 잊었다. 물론, 가끔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긴 했다.


J는 유독 상사의 불합리한 행동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의 표출은 언제나 자신을 향했다. 선생님의 부당함 앞에 고개를 숙였던 아이는, 여전히 조직 속 약자인 자신을 탓했다. 그러다 불안장애가 찾아왔고, 그녀는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다들 꺼리는 질문을 나서서 하거나 부당한 지시엔 부당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불편한 이야기에 억지로 웃는 대신 정색으로 대응했다. 그녀는 어느새 오늘만 사는 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진 않았다. 가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급습했다. 그러다 다섯 번째 조각 '거수기와 쓰레기', 여섯 번째 조각 '민방위교육장'을 발행하고 난 후, 그녀는 그 불안감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과잉 보상이었다. 다시는 무력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었다. 방어는 어느새 공격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결국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불안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된 찰나의 조각이 그녀의 현재를 비추고 있었다.




J는 오빠와 이야기할 때면 자신의 보잘것없는 기억력에 놀라곤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인생을 관통한 강렬한 감정은 선명하게 남아 기억에 저장되었다. 그 찰나의 순간은 온 세상의 잡음이 일순간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자연의 이치와 맞닿은 듯했다. 그래서 아픔도, 수치심도 견딜 수 있었다. 이 순간들을 직면하지 않고는 자신과 온전히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찰나의 조각들이 모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열네 편의 이야기는 때론 공포를, 때론 수치심을 몰고 왔다. 기억을 되돌리는 게 두려워 글 작성을 미룬 날도 있었다. 하지만 초안을 작성하고 나면, 발갛게 상기된 얼굴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자신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충일감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물론, 행복으로 물든 조각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내심 신경이 쓰였다. 자신의 인생이 우울로 점철된 건 아닌지 자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많이 운만큼 많이 웃었고, 많이 좌절했던 만큼 다시 일어설 줄도 알았다. 누구보다 감정을 진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욕심일지도 몰랐다. 행복의 순간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낚아챌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이르자, 그녀의 마음속 새겨진 십 여 개의 상처는 되려 적은 숫자처럼 보였다. 덕분에 많이 지치지 않은 채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각을 하나하나 채워가며 다채로운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J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어려웠다.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방법을 여전히 찾고 있었다. 그간 그녀는 큰 시험을 앞둔 아이처럼 살았다. 작은 쉼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쉼마저도 내일을 계획하며 보냈다. 그녀에게 삶은 반드시 멋지게 완성해야 할 작품이었다. 작품의 성공을 위해선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계획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연은 커다란 바람을 몰고 다가왔다. 바람을 타며 흔들리라고, 버티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녀는 되려 무릎에 힘을 꽉 주며, 자연과 의미 없는 기싸움을 벌였다. 결국 그녀는 제 풀에 꺾여 무대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매일 밤 약을 먹으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더는 자신을 보채지 않았다. 40년 가까이 굳어진 틀을 바꾸기엔, 10년이란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대신 그녀는 감정의 중심에 있을 때 이를 알아차리려 애썼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찰나의 조각들이 모여>는 J가 어릴 적 잃어버린 색칠놀이 책을 그녀 곁에 조용히 놓아주었다. 연재에 자주 등장한 그녀의 조카 역시 어릴 적 색칠하기를 좋아했다. 귀여운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지며 집중할 때면, 두 눈이 즐거움을 찾아 반짝거렸다. 반드시 잘 칠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칸 한 칸, 그림이 채워질 때마다 조카는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평가를 기다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만족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어제도, 오늘도, 타인도,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는 이 순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비로소 자신에게 불어 온 바람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흐름을 타며 가볍게 날아오르라고, '반드시'가 사라진 세상이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제껏 그래왔듯, 삶은 계속해서 다양한 순간들을 그녀 앞에 펼쳐 보일 것이었다. 그러면 보다 가벼워진 몸짓으로 고유한 색채를 그려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저 멀리 수많은 찰나의 조각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J는 막 마지막 이야기를 마쳤다. 키보드의 엔터를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위로 올려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부족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이 부족한지 콕 집어낼 수 없었다. 연재의 마지막을 그럴듯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연재를 보내줘야 할 시간이었다. 뜨거운 여름에 시작된 연재는 칼바람이 이는 늦가을까지 이어졌다. 이 계절을 닮은 진한 감정을 글로 전할 수 있어 행복했다. 서툴고 약하며 어리석은 자신과 마주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품어낸 스스로가 대견하고 감사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J는 여전히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차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그녀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곤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새겨나갔다.


"그동안 저의 글을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글이 편치는 않았을 거예요. 너무 내밀해서 불편하셨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 마음에 고요히 가라앉았던 부정적 감정이 일렁이며 솟아올랐을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민낯의 감정을 따라가는 이 여정에 동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외롭지 않았어요. 여러분의 여정이 시작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저 역시 힘찬 응원으로 함께 할게요. 여러분과 함께 저 자신을 만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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