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출근길 : 고독
마음을 향해 귀 기울이셨나요?
이제 마음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입니다.
안녕하세요. 진언眞言입니다. 5월이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시간이 무서울 만큼 빠르죠. 날아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지 않으세요? 한땐 저도 시간 관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생산성 향상에 관한 책도 읽었죠. 그중 티아고 포르테의 <세컨드 브레인(두 번째 뇌)>이 기억에 남아요. 저자는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을 외부 시스템에 저장해 놓으면, 기억을 되짚느라 소모하는 에너지를 창의적인 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메모 체계가 갖춰진 사람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라 ‘친구’라고 강조하죠. 자기 대화도 메모예요. 마음을 기록하는 마법의 메모죠. 우리를 그 순간으로 이끄니까요. 생생한 순간들이 모이면 하나의 거대한 섬을 이룹니다. 바로 '나'라는 섬이죠. 제 섬은 지금 봄을 맞이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섬은, 안녕한가요?
‘섬’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세요? 전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요. 물론 여러 섬이 합을 이루는 군도도 있어요. 지금 머무는 전철의 칸도 군도예요. 개인이라는 섬이 모여있는 거대한 군도 말이에요. 둘러보니 약 200개의 섬이 모여있는 듯해요. 엄청나죠. 1호선은 10량이니, 약 2,000개의 섬이 함께 움직이는 셈이죠. 각각의 섬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진언眞言의 섬은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를 까칠한 염세주의자(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에 대해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로 묘사하곤 하죠. 하지만 그는 삶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었어요. 평생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죠. 무엇보다, 전 그의 솔직함이 좋아요. 나이 들수록 솔직한 사람을 만나기 어렵잖아요.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을 꽁꽁 싸매니까요. 마음을 나눈다는 게 점점 어려워지죠. 그래서 철학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마음과 세상을 읽는 게 업(業)인 사람들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죠. 철학은 기본적으로 고독을 사랑하는 학문이에요. 외로움과 달리 고독은 자발적이에요. 단순히 혼자 있는 상태를 넘어 자신과 깊은 교감을 느끼고 내면의 공간에 고요히 머무는 시간이 바로 고독이죠.
고독은 산책이에요.
자신과 함께 걷는 산책의 시간이죠.
잠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의 표정을 살핍니다. 각기 자기만의 섬에 빠져 있어요. 누군가는 영상을 보며 미소 짓고, 누군가는 카톡 대화에 열중하고 있어요. 아, 앞에 앉은 사람은 이마와 무릎이 만나기 바로 직전이에요. 아슬아슬하네요. 전 자신과 만나기 직전이에요. 나날이 자신을 향한 이해가 쌓이고 있어요. 세상과는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요. 때론 무너질 때도 있어요. 감정이 없는 돌멩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잡습니다. 탄력성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죠. 마음 근력이 튼튼해진 덕분입니다. 마음 근력을 튼튼하게 하는 건 고독만 한 게 없어요. 여러분에게 고독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어두운 밤, 노을빛의 은은한 조명이 여러분의 섬을 비춥니다.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자리를 잡아요. 섬의 핫플레이스예요. 눈을 감고 파도의 소리를 느껴보세요. 자잘한 돌 위로 밀려온 파도가 자그맣게 속삭이고 있어요. 오늘은 편안한 하루네요. 잠시만요, 폭풍우가 몰려옵니다. 소중한 은신처로 달려갈 시간이에요. 창문으로, 하늘을 먹어치우는 큼지막한 파도를 바라볼까요. 오늘은 바다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어요.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법이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여러분의 섬을 찬찬히 살핍니다. 맞아요. 고독은, 일종의 산책이에요. 자신과 함께 걷는 산책의 시간이죠.
나를 향한 옅은 미소는
자신에게 전하는 찰나의 응원이에요.
이제 신도림역이에요. 앞에 앉은 사람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어요. 내릴 사람이 확실해요. 제 자리인 거 같아요. 와우, 앉았어요! 조금이라도 앉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아요.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있어야 그 행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죠. 이제 서서 오느라 굳은 허리를 다독여야겠어요. 고독의 시간은 단순히 마음만 다독이는 게 아니니까요.
이어폰에서 좋아하는 재즈곡 ‘smile’이 흐르고 있어요. 냇 킹 콜(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가수)이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웃어요, 웃어봐요.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웃다 보면 삶이 가치 있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계속 웃는다면 말이죠.’ 예전 제 미소가 떠오릅니다. 잘 웃었어요. 행복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활짝 웃었어요. 그러나 행복한 기억은 아니에요. 타인을 위한 미소였으니까요. 어느 날, 회사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서 제가 아닌 피에로를 발견했거든요. 힘겹게 웃고 있는 피에로요. 억지웃음은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요.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면을 움켜쥐고 있으니까요. 요새는 옅은 미소만 지어요.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만요. 옅은 미소는 자신에게 전하는 찰나의 응원이에요. 나를 향한 미소는 지금 이 모습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줘요. 괜찮다고 말이죠.
충돌하지 않고 경계를 지키는
지질의 질서를 배워야 할 시점이에요.
이쯤에서, 궁금하실 수 있어요. 혹시 제가 나르시시스트(자기중심적이며 자기애에 강하게 의존하는 사람)가 아닌가 하고요. 충분히 가능한 질문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만 그럴까요? 아닐걸요. 질문하시는 분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얼마 전, 나르시시즘을 인간의 두 번째 본능이라고 정의(에리히 프롬, 독일 출신 심리학자·사회학자)한 구절과 만났거든요(「주역 심리학」, 양창순). 저자는 인간 이해의 핵심은, ‘누구에게나’ 삶의 시작과 끝은 바로 ‘나’라는 존재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아요. 특히 인간관계가 촘촘히 연결된 한국 사회에선 더욱 그렇죠. 이 사회에선 자기 중심성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집단주의 문화는 개인주의를 해악으로 치부하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인간이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이타주의도 결국은 타인을 돕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하니까요.
인간관계에 옳고 그름은 없어요. 서로가 외계인처럼 낯설 뿐이죠. 낯섦과 마주할 땐, 이렇게 되뇌어보세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상대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고, 내게도 당황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이죠.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섬은 서로의 위치를 존중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해요. 우리도 독립적인 섬이에요. 군도를 이루고 있을 뿐이죠. 서로 충돌하지 않고 경계를 지키는 지질(지구 표면을 이루는 땅과 암석의 성질이나 구조)의 질서를 우리도 배워야 할 시점이 아닐까요.
다행히, 제 근처엔 좋은 섬들이 많아요. 그럼에도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사십 년을 넘게 지켜봐 왔는데, 전혀 질리지 않고 매번 새롭거든요. 알지 못했던 모습과 마주칠 때면 신이 나요. 저를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하죠. 물론 어제는 회식 얘기에 위축되는 자신이 밉기도 했어요. 갑자기 자책이 고개를 들며 무섭게 노려보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유난이니? 너보다 비사회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당황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실인걸요. 그런데, 정확히는 선택적 비사회성이에요. 좋아하는 상대 앞에선 에너지 소모를 걱정하지 않아요. 에너지는 기쁨으로 전환되거든요. ‘선택적’이란 단어는 자유의지를 내포해요. 선택적 비사회성은 제 자유의지의 표출인 셈이죠. 그래서 자신에게 되물었어요. ‘나의 의지로 선택한 일을 왜 자책하니? 난 쉽게 판단하고 결정 내리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 믿어. 그것이 자유의지에 대한 올바른 책임이니까 말이야.’
요즘 노션(Notion, 디지털 작업공간)에 빠져 있어요. 그곳에 제 세상을 만들고 있어요. 매일 회고도 하고, 다양한 기록을 남겨요. 일요일엔 주간 기록을 보며 일주일을 돌아봐요. 저를 만나는 곳이에요. 얼마 전엔 브런치스토리 관리 페이지도 추가했어요. 노션이 제 섬의 핫플레이스인 셈이죠. 우리는 모두 혼자만의 섬에 살고 있어요. 섬을 가꾸어나가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에요. 그건 고독을 얼마나 반갑게 맞이하느냐에 달렸어요. 여전히 고독이 두려우신가요? 우리는 고독의 시간 속에서 아픔도 성장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어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신과 끝까지 놀아 줄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오롯이 나로 일어서려는 자신을 응원해 주세요. 여러분의 섬은 지금, 싱그러운 숲으로 변하고 있으니까요.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찾고 있는 해답은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