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여섯 번째 출근길

by 진언

안녕하세요. 진언眞言입니다. 오늘은 역에 일찍 도착했어요. 스크린도어에 비친 머리를 매만지고 물도 한 모금 마셨어요. 여유로운 시작이죠. 30분 전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에요. 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했거든요.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순간, 머릿속에 환승이란 단어가 반짝였어요. 맞아요. 우리에겐 고마운 환승 시스템이 있죠. 바로 도착한 버스를 탔어요. 그리고 역으로 향하는 다른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죠. 덕분에 늘 타던 급행열차에서, 자기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날이에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 글을 보면 눈이 더 나빠진대. 되도록 눈을 감고 있어.’ 딸의 눈 건강을 걱정한 엄마의 당부였어요. 그렇다고 자기 대화를 놓칠 순 없죠. 제 행복이니까요. 대신 안경을 썼습니다. 아뿔싸, 놓친 게 있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었네요. 날숨에 서리가 올라왔다가, 들숨에 사라지고 있어요. 우습게 보이진 않을까요. 순간 얼굴이 빨개졌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눈을 지켜야 하니까요. 몇 년 전까지 제 시력은 1.5와 2.0 사이였어요. 갑자기 찾아온 난시는, 시력이라면 자신 있던 저를 좌절의 늪으로 끌어내렸죠. 저의 오랜 친구 J는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았어요. 그녀는 제 고민에 이렇게 말했죠. ‘난 잘 안 보였잖니. 그래서 노안이 오는지도 몰라.’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편안해요. J는 합리적인 사람이에요. 받아들일 건 바로 받아들이고, 다음을 생각해요.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죠. 제가 J를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상반되는 인생을 살았거든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떼를 썼죠. 20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간혹 그런 모습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시간이 어른을 만들어준다는 건, 철없는 기대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과 마주할 땐, 다시 기대를 품게 돼요. 나도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시선은
감정과 의지가 담긴 내면의 시력이에요.


시력이 좋으면, 마음의 시선까지 항상 밝을까요? 아쉽게도 아니에요. 시력은 물리적인 능력이지만, 시선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니까요. 감정과 의지가 담긴 내면의 시력이죠. 오늘은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먼저, 어젯밤으로 시간을 돌려볼게요. 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와 아빠의 표정을 살펴요. 오랜 습관이에요.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랬어요. 일어나면 물을 찾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습관이죠. 아빠 표정이 밝지 않으셔서 이유를 여쭤봤어요. 별 다른 이유는 없다고 하셨어요. 당사자도 알지 못하는 기분의 변화를 제가 감지했나 봐요. 샤워하며 이 습관을 생각해 봤어요. 어쩌면 이건,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눈치 보기는, 부모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아이의 본능적인 반응일지도 모르니까요. 어릴 적 부모님은 제게 해주실 수 있는 모든 걸 해주셨어요. 하지만 고된 일상에서, 아이의 섬세한 마음까지 챙겨주기엔 버거우셨을 거예요. ‘이 세상에는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녀도 없다.’ 미국의 가족관계 전문가 데이브 윌리스가 한 말이에요. 저도 완벽하지 않은 자녀겠죠. 결국 제 태생적 예민함은, 저를 생생한 기분 탐지기로 만들었어요. 이 탐지기는 고장 없이 40여 년을 작동하고 있어요. 물론 유용할 때도 있어요. 인생에 그냥 스쳐 가는 일은 없잖아요. 모든 것이 저의 세포를 이루고,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과거를 부정할 수 없죠.

오늘 점심엔 약속이 있어요. 마음이 무거워요. 제게 점심시간은 이완의 시간이거든요. 오전 내내 긴장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시간이죠. 한 실장님이 식사를 제안했어요. 한국인들은 밥심으로 살죠. 친해질 때도 밥심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그런데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면, 타인의 에너지 방향을 알 수 있어요. 자신을 향한 사람인지, 외부를 향한 사람인지요.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내향인이에요. 가깝지 않은 상대와의 식사는 내향인에게 버거운 숙제예요. 회식 때마다 찾아오던 체기도, 결국은 내향인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신호였죠. 어느 날 내과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본인 모습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요, 라고요. 그 후로 마음을 조용히 살피기 시작했어요.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죠.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요샌 어린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아요. ‘빨강머리 앤’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저는 이제 사라졌죠.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무엇보다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이렇게 늙어가는 거겠죠.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해요. 과거엔 말수가 줄어드는 선배가 신기했는데, 조금씩 이해가 돼요.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게 되는 이유 말이죠.


제 마음속 두 시선이,
양 쪽에서 한껏 줄을 당기고 있어요.


제 안에는 두 가지 시선이 있어요. 하나는 ‘완벽주의’의 시선이에요. 이 시선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봅니다. 100점 아니면 0점이죠. 저는 완벽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0점 가까이에서 맴돌곤 하죠. 그럼, 열패감(남보다 못하고 지거나, 뒤처졌다는 느낌)이 조금씩 커져요. 빵 하고 터지기 직전, 이번엔 다른 시선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르시시즘이에요. 완벽주의 시선의 반대편에 위치하며 저를 부추기죠. 아니야, 네가 최고야, 라고요. 둘의 싸움을 지켜보면 정신이 혼미해져요. 완벽주의가 이기는 날엔 열패감에 휩싸이고, 나르시시즘이 이기는 날엔 오만함이 세상을 찌르죠. 어느 날 궁금해졌어요. 열등감이 기본값인 사람에게 갑자기 나르시시즘이 발동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요. 어쩌면 자기 보호일지도 모르겠어요. 행여 열등감이 자신을 먹어 치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무의식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벽인 거죠. 열패감을 잠재우려면 나르시시즘도 그만큼 커져야겠죠. 맞서야 하니까요. 그렇게 커진 두 시선이 저를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타협할 수 있을까요. 양쪽에서 한껏 당기고 있는 고무줄 같아요. 이 긴장을 푸는 방법은 하나예요. 느슨해지는 거죠. 한쪽이 살짝 힘을 빼면 다른 쪽도 느슨해질 수 있어요. 우선, 완벽주의 시선부터 다독여야겠어요. 갈등의 시작은 이 시선이었으니까요.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루틴 있는 삶을 좋아해요. 출근길 버스 안에선 오디오북을 듣죠.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었어요. 《명상록》 제1권은 그를 있게 한 모든 것에 감사를 표하며 시작해요. 가족, 친구, 심지어 반대 세력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자연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는 인간이 우주의 작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요. 원소(자연에서 존재하는 기본적인 물질)로서 인간을 바라보죠. 인간의 생사生死도 결국 원소가 통합되고 해체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봅니다.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으세요? 그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감사한 일이에요. 그의 시선으로 저를 봐 볼까요. 제겐, 늘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하고 계세요. 40대 중반에도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있고요.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아요. 이렇게 글도 즐겁게 쓰고 있죠. 감사할 일 천지예요. 그럼에도 왜, 제 시선은 언제나 반대 면에 닿아 있었을까요.


자연과 즐겁게 지내다 오길 바라는 마음,
그게 자연의 기대일 거예요.

눈을 들어 사람들을 살핍니다. 이 전철 칸에도 우주의 수많은 원소가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요. 완벽한 옷차림을 한 사람도, 헐벗은 사람도 없어요. 다들 비슷해요. 마음도 저와 다를 바 없겠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같은 원소 속에서 얼마나 더 빛나고 싶은 건지요. 끊임없는 비교로 얻은 건, 열패감과 오만함의 악순환뿐인걸요. 똑같이 해체의 길로 나아가는 원소 사이에서, 손톱만큼 앞서간다고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루에 48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연은 공평하게 24시간을 제공하고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어진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죠. 다시 시선을 제 안으로 돌립니다. 자연이 제게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월등한 존재였을까요. 아닐 거예요. 자연과 잘 어울리며, 즐기다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이제야 저의 부족한 부분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아요. 그건, 자연이 제게 기대한 소명을 외면한 걸 거예요.




갑자기 어젯밤 꿈이 떠오릅니다. 20대였어요. 동문회 모임이 왁자지껄하게 펼쳐지고 있었죠. 여자 동기 두 명이 모임을 주도하고, 남자 선배들은 그 둘만 바라봤죠. 그 사이에서 눈치만 보다, 결국 진이 빠져버렸어요. 완벽한 재연이었죠. 돌이켜보니, 맥락 없이 등장한 꿈이 아니네요. 타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저만 모임을 즐기지 못했거든요. 자신의 허점을 타인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생기 자체가 사랑스러운 20대였는데 말이죠. 아이가 혼자 자기를 갖고 놀 듯, 장점들만 그러모아 시간을 즐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물론, 지금도 늦지 않은 걸 알아요. 여전히 매력적인 것도 알고요. 이번엔 나르시시즘이 강하게 표출된 건가요? 글쎄요, 이젠 저의 장점에 따뜻한 시선을 줘도 되지 않을까요. 40여 년을 기다려 왔으니까요. 이제 여러분에게로 시선을 돌려볼게요.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시선은 무엇인가요? 그 시선은 매서운가요, 아니면 따뜻한가요. 매섭다면 그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보세요. 따뜻하다면 감사를 표하고요. 이유 없는 시선은 없으니까요. 오늘도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이 찾고 있는 해답은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요.


나를 만나는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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