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KM, 17일간의 기록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샐리야, 지금은 어디야? 지금은: 여행 중'은 이번 주만 미리 글을 올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내일 35번째 나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거든요!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여름이 찾아왔다. 21살 나의 여름, 그 428KM 17일간의 기록을 꺼내본다.
우선, 지급받은 물품 중 하나인 나의 28리터짜리 배낭을 꺼내보겠다. 지금도 이 배낭으로 종종 여행을 떠난다. 당장 내일모레 떠나는 일본 여행도 이 배낭으로 말이다. 어떤 여행이든 간에 배낭은 가벼운 게 장땡이다. 그래서 나는 국토대장정용 배낭에 쪼리 1 켤레, 양말 2 켤레, 속옷 2장, 물병 3개씩, 빨래집게와 빨랫줄, 손 수건과 쿨 타월, 손톱깎이, 선크림, 보조배터리, 충전기, 여분 배터리, 선글라스, 수첩과 볼펜, 우비, 안경케이스와 안경닦이, 수분크림, 빨랫비누, 치약과 칫솔, 샤워젤과 샴푸, 렌즈 약과 렌즈통, 그리고 페이스 오일을 담았다.
그럼 시작!
1일 차부터 모든 기록은 스마트폰 GPS의 기록이지만 오차범위가 매우 크기 때문에 그냥 느낌만 받고 수치는 잊어버리시기를.
1일 차
오늘의 거리: 23KM
오늘의 기부: 2,241 눈
국토대장정을 출발하기 전에 학교에서는 발대식이 진행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몰랐다. 이번 여름이 얼마나 더울 것인지를! 나는 국토를 조금 더 의미 있게 완주하고 싶어서 빅워크라는 걸으면서 기부하는 어플을 항상 켜두고 걸었다. 매번 모금통을 선택해서 모금할 수 있었고, 내가 선택한 첫 번째 모금통은 바로 장애인 분들을 위한 아름다운 동행 건강 날개라는 모금통이었다. GPS를 켜두고 걸었지만 오차가 꽤 크게 나왔기 때문에 오늘의 거리는 매우 정확하지가 않다는 점을 참고해주시기를. 총 428KM라는 것만 정확하다! 10미터가 1의 눈으로 기부가 되는 방식이다. 10개의 조가 대열로 이동하기 때문에 일정한 속도와 규칙이 필요했고, 키 작은 나는 유독 남들의 걷는 속도에 맞추는 게 힘들었다. 남들처럼 성큼성큼 못 걷는 게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2일 차
오늘의 거리: 33KM
오늘의 기부: 3,293 눈
첫날만큼 세상에서 제일 긴 하루가 있었을까 싶다. 이미 다 완주한 것 같은데 고작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매일매일 손빨래와 물병에 좀비처럼 물을 채우러 찾아다니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이 하루에 몇 번 밖에 공급이 안됐는데 배고픈 것을 떠나서 목마른 것이 제일 참기 힘들었다. 몇 리터를 허겁지겁 들이키는 것도 모자랄 판에 500ml 1병이나 2병으로 몇 시간을 버텨야 했다. 사람은 물을 못 마시면 미친다는 것을 배웠다. 평소에 러닝과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국토는 완전 다른 차원의 체력과 멘탈력이 필요한 경험이었다. 압박 붕대는 나의 절친이 되어주었다. 아, 안 마른빨래는 배낭에 빨래집게로 걸고.
3일 차
오늘의 거리: 38KM
오늘의 기부: 3,795 눈
3일을 걸은 후에 비로소 깨달았다. 3일 내내 입에 모터가 달린 듯, 그렇게 불평불만이 쏟아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나의 못난 모습을 발견했다. 무릎과 발목에 압박붕대를 감고, 배낭끈 때문에 어깨와 쇄골은 다 쓸리고, 미친 듯이 습하고 꿉꿉하고 더웠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는 것과 불평하는 마음으로 걷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이제 불평 금지령을 내게 내렸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반성하고 또 반성하는 날이었다. 1시간이 곧 1타임. 그때마다 10분씩 쉴 수 있고, 매일 5분 동안 초스피드의 샤워를 할 수 있고, 앰뷸런스를 안 타서 감사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걷는 동안 100여 명의 학생들 중 유일한 채식주의자인 나를 위한 반찬도 1개씩은 꼭 있어서 감사했다. 게다가 이날 저녁은 특별히 다 채식이었다!
4일 차
오늘의 거리: 23KM
오늘의 기부: 2,351 눈
89명의 대원들과 22명의 서포터즈들. 7개월의 준비기간, 정확히 212일을 준비했다고 하는 그들. 10개의 조 중 나는 5조. 우리 조에 나를 포함한 여자 4명 중 한 명이 중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외 2명은 중간에 처음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했다. 다른 팀에서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나는 정말이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고 싶었다. 이때는 그럴 줄 알았다. 빅워크 기부는 처음에 300위였는데 4일 만에 누적거리를 쌓으면서 24위로 올랐다. 인천시에서 시작해서 서울시, 하남시, 그리고 남양주시를 건넜다.
5일 차
오늘의 거리: 39KM
오늘의 기부: 158.47 눈
4일 차까지 기부했던 장애인 아름다운 동행 건강 날개 모금통이 이날로 완료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새 모금통은 바로 미혼모 엄마들을 위한 한국 메나리니 풀케어의 자립비용 마련과 손발 건강 모금통. 남양주시를 넘어 서종과 양평, 그리고 가평까지 진입했다! 10개의 팀들이 매일매일 돌아가면서 선두를 이끄는데 우리 5조는 5일 차라서 맨 앞에서 선두를 이끌게 되었다. 맨 앞을 걸을 때가 가장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날은 축구장에 텐트를 치고 침낭을 돌돌 펴서 잘 준비를 했다.
6일 차
오늘의 거리: 35KM
오늘의 기부: 3,470 눈
경기도 가평군에서 출발해서 강원도 홍천군을 거쳐 춘천시에 도착했다. 팔봉산 아래에 텐트를 치는 날이었다. 이제 제법 익숙해져서 텐트 치는데 둘이서 10분도 안 걸린다. 우리 5조 팀원 중 한 명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와서 완주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우리 조 여자는 나를 포함해서 딱 2명만 남았다. 그리고 매일매일 하는 불침번. 이날 나는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불침번을 섰다. 한국에서 오래 자라 보지 못한 나는 작은 규칙과 눈치 하나하나 어려웠다. 내가 처음 기대를 한 국토는 사진도 마음껏 찍고 국내여행에 가까웠는데 이건 군대를 연상시키는 행렬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대장정은 조금 느리게, 그리고 조금 더 자유롭게 혼자 훌쩍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일 것이다.
7일 차
오늘의 거리: 35KM
오늘의 기부: 3,496 눈
강원도 춘천시에서 남춘천역을 지났다. 여자 텐트에 2명밖에 없어서 조금 허전했다. 그래도 5조가 제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때 내게는 가족 같았다. 서로의 바닥의 모습을 숨길 수 없는 그런 것처럼.
8일 차
오늘의 거리: 26KM
오늘의 기부: 2,602 눈
거의 마지막에 이르는 7, 8번째 타임을 다 걷고 가끔씩 받는 빵과 아이스크림 간식은 정말 꿀맛이다. 매일 치료해주시는 앰뷸런스 부부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도, 마사지해주시는 교수님과도 이야기 꽃이 활짝. 자꾸 예쁜 말만 하고 짜증 안내기로 했는데 다짐이 수없이 무너지고 무너진다.
9일 차
오늘의 거리: 31KM
오늘의 기부: 3,122 눈
국토대장정의 중간 지점인 춘천에 도착했다. 이 곳은 인하대학교 학생들에게는 잊히지 말아야 할 곳 중 하나다. 춘천 봉사활동 희생자 5주기 추모식. '인하대 선배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2011년 인하대 아이디어 뱅크라는 동아리에서 발명캠프 봉사를 왔다가 산사태로 인해 10명의 학생들을 잃었다. 사고가 일어났던 상천초등학교에서 추모식과 헌화 시간을 가지고, 이를 기억하며 매년 진행하는 초등학생 발명 장학금 수여식까지. 그리고 국화꽃 한 송이. YTN에서 취재를 왔다가 인터뷰를 요청하셔서 짧게 한마디 했다. 그리고 이날 정확한 실제 거리로 200KM를 돌파했다!
10일 차
오늘의 거리: 12KM
오늘의 기부: 1,224 눈
춘천시에서 화천군으로 넘어온 날, 비가 무진장 쏟아졌다. 비 오는 날에는 우비를 챙겨 입고,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면 된다. 운동화와 양말은 비에 흠뻑 젖고 나는 키가 작아서 우비가 거의 드레스였다. 그리고 미혼모 자립비용 마련 모금 통도 완료되어서 새로운 모금 통인 보육원 꿈나무 모금통을 시작했다. 내가 걷는 한 걸은 한 걸음이 그냥 조금 더 의미가 있기를 소원하면서. 이날 오후에는 화단 잡초뽑기 봉사를 모두 했다. 아직까지 물집이 하나도 없다.
11일 차
오늘의 거리: 26KM
오늘의 기부: 2,688 눈
포천에 진입했다. 다시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들어온 것이다. 이날도 비가 와서 우중 국토를 하고, 많은 대원들이 포기했다. 그런데 나도 처음부터 계속 배탈의 연속이었고, 그래서 이날 처음 8시간 중 3시간을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했다. 나의 첫 다짐은 절대 앰뷸런스를 타지 않는 것이었는데. 포기한 것 같아서 속상했다. 국토를 떠나기 전 혼자 갔다 온 캄보디아 배낭여행에서 식중독에 걸려서 국제병원으로 실려갔었는데 갔다 온 지 얼마 안 되자마자 바로 국토를 떠나서 무리였던 것일까. 여기서 점점 더 심해져서 돌아가면 다시 정밀검사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14일 차에 집으로 귀가해서 15일 차에 서울대병원에서 진찰받고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계속 아팠던 나를 위해 밥차 아저씨들께서 특별히 야채죽을 만들어주셨다.
12일 차
오늘의 거리: 28KM
오늘의 기부: 2,785 눈
7월의 마지막 날, 보육원 꿈나무 모금 통도 완료돼서 새 모금 통인 금천구 보건소 어르신 건강운동교실 모금통을 시작했다. 그리고 포천시에서 연천군으로 도착하고. 그때 돌아와서 같이 완주한다고 했던 여자 조원이 6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말이다, 국토대장정을 완주한 모든 사람들을 리스펙 한다.
13일 차
오늘의 거리: 22KM
오늘의 기부: 2,150 눈
8월이 시작됐다. 고지가 보이는 순간! 오늘도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불침번을 하고 파주시로 진입했다. 역시나 오늘도 배탈이 나서 앰뷸런스 2시간을 탔다. 앰뷸런스로 같이 이동하는 대원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다.
14일 차
오늘의 거리: 0KM
오늘의 기부: 0 눈
오늘은 2타임만 걷고 나머지 2타임은 앰뷸런스를 또 탔다. 그리고 오전 타임이 끝나자마자 귀가행. 파주역에서 성남시로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다. 그다음 날 병원 예약이 있어서. 오늘로 4개의 모금통을 완료해서 돌아오면 5번째 모금통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2주 차를 넘기면서 좌절을 했다. 몸이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데 괜찮을지,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어디까지 나누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내가 생각했던 국토가 기대와는 달랐는데도 끝까지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버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다시 완주를 할지,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들이 가득했다. 윤하의 'Sunflower'라는 곡을 들으면서. 그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그 길을 찾으면 웃을 수가 있을까. 지나간 아픈 기억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언젠가는 눈물 멎으면 힘들던 시간이 말하겠지 내게 고마웠다고 힘내라고 괜찮을 거라고 내게 말해. 나는 나를 더 아낄 거야. 나는 나를 사랑해. 내가 무엇을 정말 원했었는지 불안한 난 뒤돌아봤어. 다시 울지 않을래. 아직 늦지 않았어.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내 하루에 정말 감사해. 감동 주기를 바라. 내 미래에 걱정 말라고 내게 말해'.
소견서를 받아오고 무릎 연골 물리치료도 받고, 새벽에 또 배탈 나서 진찰받고. 국토가 끝나면 나는 스웨덴 교환학생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검사일정도 타이트했다.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 그리고 피검사를 또 했다. 이 날 다시 합류하려고 했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마지막 날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완주한 다음 날 검사받기로. 설상가상 갑자기 왼쪽 아래 나의 첫 사랑니가 나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사랑니는 스웨덴 가기 전에 언제 뽑지 고민하고 있을 때 5조 팀원들에게서 깜짝 카톡이 왔다. 14일 차와 15일 차를 포기했지만 응원해주는 5조가 있었다. 의미라는 것은 그리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16일 차 저녁에 복귀해서 다음날 17일 차에 완주를 했다. 인하대로 돌아오는 길, 모두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잘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눈물들이 쏟아졌다. 단체사진도 찍고, 사진도 많이 찍고. 정말이지 청춘의 도전이었다. 상처도 많이 받고 사랑도 많이 받고. 기부 모금통은 총 5개를 완료했고 누적거리는 400KM를 돌파했다. 이날 하단식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나의 가장 뜨거웠던 여름은 끝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니를 뽑고, 스웨덴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몇 달 후 스웨덴에서, 5회 국토대장정의 이야기를 담은 책, '청춘 그 시작과 끝을 함께하다'가 도착했다. 111명의 학생들과 함께했던 이 여름. 대학생활의 반을 넘기고 있다는 것도. 첫날과 마지막 날을 모두 인하대학교에서 보냈던 국토대장정을 완주하니 나의 대학생활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직까지 아쉬운 점 하나 없는 나의 대학생활. 여름이 찾아올 때마다 문득 고개 올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생각날 것 같다, 나의 국토대장정. 오랜만에 책을 꺼내볼까나.
제가 찍은 사진들도 있고, 인하대학교 국토대장정 서포터즈에서 받은 사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청춘, 그 시작과 끝을 함께하다' 책 사진들까지.
지금은: 여행 중
앞으로 매주 토요일, 저의 여행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보려고 합니다.
Breakfast: http://blog.naver.com/gkdmsin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