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sire to Write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을 품은 시대는 없었다. 소설이든 자서전이든 언제가는 책을 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현대인이 품은 열망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단히 환영할만한 발전이며,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광범위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졌으며 삶을 바꾸는 책의 힘을 적절하게 강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 즉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소 주제에 벗어난 결과일 수도 있다. 즉,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은 고립과 외로움이 유행처럼 번진 결과다. 문학 에이전트와 스카우트, 편집자, 글쓰기 코치가 군단을 이루는 이 현상은 우리가 문학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고통스러운 고독의 땅이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다는 현상도 반영한다.
물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구조적으로 가장 단순한 선택안이 가장 널리 퍼져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까운 곳에 우리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글을 쓴다. 한 페이지에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고 싶다. 친구들이 굳이 우리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파트너는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어서, 누구라도 존중과 집중의 마음으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긴 시간을 우리에게 내준 적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래 되어서, 한 마디로 너무 외로워서 글을 쓴다.
글쓰기는 즐거움이나 무심한 지적 매력의 경험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좌절과 수치심,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어서 시작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러왔는데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조용히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다. 글쓰기는 그 아래 깔린 더욱 가슴 아픈 야망을 향한 표현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내 말을 들려주고, 존중 받고, 감성을 해석 받고, 위안을 얻고, 알려지고, 인정을 받고 싶은 야망 말이다. 플로베르는 이런 마음을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다. 18살에 사랑에 빠져 행복했다면 결코 글을 쓰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라고.
서구의 자아인식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글쓰기는 사려 깊은 인간이 시간을 들여 할 만한 이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소크라테스에게 글쓰기란 진정한 소명이 아니라 그저 미약한 대안 혹은 모방에 불과했다. 그에게 진정한 소명을 동료 인간과 실시간으로 육체를 통해 나누는 대화, 가끔은 테이블에 포도주잔을 놓고, 또는 항구까지 걸어가는 길에, 혹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면서 중요한 일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였고, 글쓰기는 그것의 대체물일 뿐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관점으로 보면 문학의 탄생은 사회적 고립과 공동체 폐단의 한 가지 증상에 불과했다.
우리는 문학이 지금껏 발명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고 좋은 대체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대체물의 주된 의의가 무엇인지, 어떤 면에서는 너무 바빠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계를 향한 매우 공손하고 교묘한 복수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좋다. 우리가 의존해야 할 사람들에게 그토록 실망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향한 맹렬한 야망을 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보상으로서 글쓰기를 보다 의식적으로 인식하면 더욱 본능적인 형태의 접촉을 향한 짝사랑을 인정할 힘이 생긴다. 침대에서 혼자 글을 쓸 때의 만족감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연민할 때 느끼느 황홀한 기쁨을 계속해서 쉽게 포기하게 될 것이다. 괜찮은 소설을 쓰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를 찾는 법을 배우기란 훨씬 더 어렵지만 궁극적으로는 더욱 보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 덜 열렬한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적으로 조금씩 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말을 더 잘 들려줄 수 있는 세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문학의 손실은 인류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번역 이주혜
편집 손꼽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