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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학교 서울 Jun 14. 2018

직업의 실패에 대하여

On Professional Failure

현대의 억압적인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비판에 능해야 한다. 최악의 적도 우리가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증오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 어떤 감상이나 호의에 빠지지 않고 우리의 평범함을 바라보아야 한다. 편안함과 자기만족보다 편집증이 우세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술에 매우 익숙해 지더라도 우리의 승리는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있다. 직업상 좌절을 겪게 되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경멸하게 되기도 하고 나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심지어 자신을 없애버리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줄이려면 이따금 야심가들이 극도로 두려워하는 감정 상태를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자기연민이다. 자신을 향해 친절을 베푼다니, 방종과 재앙으로 가는 첫걸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에 문제적인 측면이 있는 만큼, 계산된 자기보살핌의 순간이 지닌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더 강해질 때까지, 당분간 자신을 더욱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감과 연민의 마음까지 거두어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패배한 것은 우리가 바보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도 있었다.


- 일이 너무 힘들었다.

우리는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성공을 사랑하게 되는 바람에 우리 앞의 도전이 어느 규모인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가 성취하고자 노력했던 것 중 궁극적으로 매우 평범한 일은 없었다.


- 우리는 미쳤다.

경멸할 의도는 없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미쳤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얼마 안 되는 인내심과 평점심을 장악하지 못해서, 반쯤은 잊었고 언제나 문제가 있는 어린 시절의 뒤틀린 프리즘을 통해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간헐적으로만 알아서, 우리는 미쳤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인간은 원래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인류 역사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그 함축적 의미를 인정하려고 원죄의 개념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의 잘못은 과거에 저지른 이런 저런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릭 속한 인간이라는 종의 훨씬 더 심오하고 기본적인 결점, 절대로 바로잡을 수 없는 풍토병 같은 오점 때문이라는 생각 말이다.


- 언제나 실패가 더 그럴 듯한 결과이다.

우리는 성공 신화를 너무 많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성공이 기준이고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공은 매우 이상한 예외이며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화만 돋우는 비교 대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우리는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통계적으로 믿을 만한 인상을 받고 그 속에서 평범한 삶을 배우고 우리 삶에 참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거의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영웅들의 삶을 전시하는 모습에 노출되기보다 일반적으로 어리석은 실수를 더 흔히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예측에 매달리는 사람들, 길을 잘못 꺾어 든 사람들, 알고 보면 최고의 선택이었는데 너무 조심하다 못해 오히려 거기서 멀어져 버린 사람들, 엉뚱한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 등은 대다수에게 무시당하고, 일부에게 미움을 받으며, 진실한 사랑의 성취를 즐기지도 못하고, 가족에 대해서는 후회만이 가득하며, 씁쓸함과 고통을 안고 죽는다.


보편적인 역경은 기본적으로는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관해 가장 기본적으로 공인받은 사실 한 가지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끊임없이 수치심을 느낀다. 바로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잔인하게도 이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감상적으로 고집해왔다. 즉, 우리는 모두 이길 수 있고 이기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절대로 굴복하지 말고 여덟 번 일어나야 한다는 회복탄력성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모든 사회, 모든 시대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리 시대의 눈으로는 낯설게 보이는 가능성을 상상했다. 바로 아주 능력 있는 사람도 일을 망칠 수 있다는 믿을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집단적 상상력의 선두에 놓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이라는 예술을 발전시켰다. 일 년에 한번 주요 도시의 거대한 축제에서 모든 시민은 끔찍하고 가끔은 소름끼치기도 하는 실패담을 지켜보았다. 비극 안에서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 부적절한 사람과 자고, 극도로 신속하고 불균형한 치욕과 첩절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그리스인들이 ' 운영' 혹은 '신'이라고 부른 존재의 소관이었지, 비극의 주인공이 단독으로 저지른 소행의 탓은 아니었다. 비극이란 운명은 반드시 개인의 장점을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손쉬운 도덕주의를 버리고 피해자를 동정하고 자신을 걱정하며 극장을 떠났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모든 것을 어려워한다.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 누군가 실패하면 결국 어떤 면에서는 능력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믿는 쪽이 더 쉬워 보인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한결 더 진실에 가까운 생각과 우리 사이는 더 멀어지고 만다. 즉, 세상이 몹시 불공평하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는 모두 비극의 경계에 서 있다. 이 사회에는 공감의 마음을 품고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극작가들이 부족하다. 


- 우리는 엉뚱한 사람을 질투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랑 아주 비슷해 보이고 또 몹시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인식이 경쟁의 고통을 촉발시켰다. 멀리서 보면 그들의 성공사례는 우리와 정말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수면 아래를 보면 그들의 성공에는 우리에게 없는 다양한 기술이 있다. 그들은 방대한 양의 금융 자료를 독창적으로 합성하는데 능숙한 매우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루 18시간을 일하도록 강요받았을지도 모르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할 수 없거나 관심도 없는 무자비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내가 아니고 그들인가? 이런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단지 자기를 괴롭히는 경쟁적인 공황상태만 불러올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존경의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자신과 부러움의 대상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정말로 평등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처한 상대적은 상황을 단순히 게으름이나 우리를 괴롭히는 외부의 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떤 성취는 정말로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 우리는 실망으로 가득한 경쟁자가 아니라 위대한 업적을 이룬 대단히 비범한 존재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자신을 원래 모습이 아닌 해낸 일로 판단했다. 

교육이나 업무는 거꾸로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 자체가 아니다. 지위나 물질적인 성공은 우리의 일부를 구성하지만, 다른 요소도 있다. 어린 시절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최고의 순간에 우리 역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와 맺었던 관계를 받아들여 어떠한 요구 없이 우리를 길러주었던 모든 이들의 내면화된 목소리를 우리 것으로 연습해야 한다. 


진정한 신뢰란 누군가 계획한 일이 잘 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잘 되지 않으지라도 그 사람의 인간적인 가치가 위태로울 일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 우리는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낼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재촉 당했고,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직업, 즉 우리 성격에 완벽하게 부합하고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줄 직업을, 다시 말해 우리의 천직을 본성 깊은 곳에서 알아서 찾아줄 거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주입받아왔다. 문제는 시간이 없어서 절대로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몇 주 동안 타인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고독하게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할지 알아내는 게 어려운 것은 우리가 어리석거나 제멋대로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산발적으로 몹시 불완전한 근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 곳곳에는 혼란스러운 정보가 흩어져 있었다. 우리의 장점은 실제로 무엇이었을까? 지루한 순간도 흥분되는 순간도 있었고, 우리가 잘 대처해온 일도 잠시 흥미를 품었다가 이내 잊어버린 일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발견하고 해독하고 해석하고 종합했어야 했다. 정확한 답을 찾는 일은 높은 수준의 자기 이해를 쌓아간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사회라면 이렇게 중대한 경력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사의 초점으로 삼은 소설이 많았을 것이다. 주인공은 뚜렷한 확신을 품고 영웅적인 탐색의 여정을 시작해 어쩌면 행사 관리자나 공무원, 안과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상황에서 직업을 둘러싼 중대하고 결과적인 선택을 해왔다.


- 우리는 몹시 피곤하다.

최악의 공황상태를 탄탄한 근거를 갖춘 사실과 생각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익숙해 보인다. 


그러나 가끔 더 소박하고 해결하기 쉬운 원인도 있다. 바로 우리가 몹시 지쳤기 때문이다. 관대한 부모는 아기가 짜증을 부리고 떼를 쓰며 우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아이를 슬픔에서 벗어나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게 가치 있는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이 아이를 침대로 데려가 길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도 멍들고 화가 난 내면의 아이에게 보호자 역할을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연민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기연민은 우리가 왜 실패했는가에 대해 모든 범위의 원인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게 어리석은 바보였지만, 그래도 존재할 자격이 있고,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연민의 마음으로 용서 받을 자격도 있다. 



번역 이주혜

편집 손꼽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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