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재생 시간만 6분이 넘어 '대서사시'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곡 <Last Fantasy>를 말하기 위해선 동명의 앨범 이야기를 빼놓기 어렵다. 대중에겐 타이틀곡인 <너랑 나>로 각인되어 있을 이 앨범은, 여러 의미에서 아이유라는 서사시의 출발점이 되는 듯하다. <좋은 날> 이후 또 한 번의 흥행으로 한층 더 입지를 굳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아이유라는 존재가 고유의 이미지를 갖고 그것을 탈피한 뒤 마침내 재구축해 나간 기나긴 시간 속에서 또렷하게 첫 단추가 되어 주는 앨범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필 'Fantasy'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유심히 돌아본다.
내 호불호와는 별개로 냉정히 살펴보면, 이 앨범엔 징그러울 정도로 모든 종류의 남성 판타지가 존재한다. 첫사랑을 품은 소녀, 여학생, 조카, 공주, 딸, 철부지… 아이유를 둘러싼 시선이 어떤 형태로 조각나고 갈라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노래들이 빼곡하다. ‘뮤즈’ 아이유에게 곡을 선사한 이들이 굵직한 관록을 자랑하는 남성 뮤지션들이었다는 점이, 이제 와 생각하면 찝찝하고 거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소위 ‘아이돌’ 중심의 ’음악성 없는‘ 노래에 피로감을 드러내던 가요계에서 신예 아이유가 얼마나 반가운 존재로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제 와 생각하면 그런 분위기조차 아이돌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지만, 신인인 여성 솔로 자체가 두각을 드러내기 어려운 시장이었으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어쩌면 아이유의 음악적 비범함을 사람들이 정말로 알아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을 듣기란 꽤나 괴로운 일이다. 오빠가 좋다고 고백하는 <좋은 날>이 아닌, 동화 같은 <너랑 나>가 이야기의 포문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때 아이유를 그렇게 재단한 데에는 대중이고 제작자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연루되어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대로 서 있어야만 했던, 자기 의지보다 상대의 욕망과 시선이 우선되고 선행되어야 하던 시기를 아이유는 어떤 본심으로 보냈을까? 정말로는 본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지 알 수 없지만, 이후의 행보를 생각하면 갑갑했을 거라 추측하게 된다. 청소년으로서도 여성 아이돌로서도, 의욕이 넘치는 초년의 음악인이자 직업인으로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판타지의 틈새로, 음악인이자 직업인 아이유는 성장하고 걸어 나갔다.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을 나름대로 소화해 내며 자기 것을 찾아 나가고 할 수 있는 것을 늘려 나갔다. 13곡의 보컬을 하나하나 집중해 들어보면 어색하거나 설익은 곡들도 존재하지만, 바로 그런 설익음에서 결의와 각오가 엿보이는 것도 같다. 한 앨범에 다양한 정서와 장르의 곡을 담아내는 방식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습관이자 개성이 된 데에는 이 지나온 시간이 기반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도운 틈새로서 9번 트랙 <Last Fantasy>를 주목하고 싶다. 작사가는 김이나. 이후에도 아이유와 많은 작업들을 함께하며 오래도록 그의 동료이자 지지자로 있는 그가, 마침 이런 가사를 품은 곡의 작사가라는 점이 나는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아득한 건 언제나
늘 아름답게 보이죠
가까이 다가선 세상은
내게 뭘 보여줄까요
아직 겁이 많은 이런 나
그대라면 내가 기대도 될까요
더 조금만 맘을 열어 줄래요
그댄 누군가 필요하지 않나요
나처럼
날아갈 수 있다면
난 그대에게 갈 텐데
하지만 지난 밤
꿈 속의 의미를 나는 믿어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나
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도 되겠죠
날 천천히 기다릴 수 있나요
기도해줘요 넘어지지 않도록
나를 믿어요
이 시절의 김이나는 대체 몇 번이나 아이유에게 구원 같은 노랫말을 선물해 낸 걸까. 아이유가 주어진 판타지의 막을 내리고 자기만의 세계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설 수 있던 데에는, 어쩌면 이 곡의 도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이유를 둘러싼 숱한 시선에 '판타지'라 이름 붙이고, 나아가 '마지막'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시도 덕에 이것은 존재하나 허상일 수 있으며 결국 끝날 것으로 예견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곡은 화자의 얼굴을 다르게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묘하다. 이 노래의 '나' 역시 앨범의 다른 곡들이 보여주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다정하나, 생활감과 귀여움 대신 희망과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얼굴과 목소리를 하고 있기에, 이 곡은 다른 곡들과 동떨어지지 않고 앨범의 중심에 자리해 한 세계를 닫고 또 연다. 문을 열고 나가는 찰나 소녀가 내뱉는 마지막 말이 하필 “나를 믿어요”라는 점에서, 나는 김이나가 남겼을지도 모를 응원과 지지를 듣는다. <Last Fantasy>의 많은 곡들 중에서도 하필 이 곡이 앨범의 중심을 관통해 제목을 차지하기까지, 거기 작용했을 의지와 행운에도 기쁨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