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선량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1)
아이유를 한창 좋아하던 2010 몇 년, 한 소설을 읽으며 형광펜을 박박 그은 적이 있다(전자책이다).
얼마 전 늦게 퇴근한 새벽, TV에서 웬 유럽의 유명한 학자라는 사람이 강의하는 걸 잠깐 본 적이 있다. ‘한 작품의 창작자와 그 소비자는 전세계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각별히 맺어진 사이이며 사실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학자가 쓰는 언어는 낯설었고 ‘결’은 대체 어떻게 번역된 결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갸웃하면서도 문득 여왕님을 떠올렸던 것이다. 여왕님과 나는 결이 비슷한 거야, 하고. (피프티 피플 | 정세랑 저)
때로 콘서트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팬으로부터 ‘왜 이렇게까지?’ 싶을 만큼 호의를 건네받을 때가 있다. 얼마 전에 갔던 타 가수의 콘서트에서도 오른쪽에 앉은 사람에선 대만의 간식꾸러미를, 뒤쪽에 앉은 사람에게서는 직접 제작한 슬로건 홀더와 젤리 한 봉지를 받았다. 간식은 맛있었고 홀더는 예뻤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면 그런 문화가 정착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런 문화가 정착했냐면, 같은 사람을 애정하는 이들 사이에는 ‘연결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 작품의 창작자와 그 소비자”의 ‘결’이 같다면, 결국 동일한 작품과 창작자를 흠모하는 사람들 간의 ‘결’ 역시 같은 거니까. 최애를 목격해 온 시간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우리 인격을 직조했다. 우리는 같은 성분으로 엮어진 존재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몇 가닥 정도는 결이 같아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 가느다란 실이 존재감을 빛내는 것이다.
특히,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만큼 덕질에 빠져 있거나 인정 투쟁으로 지쳐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동질적인 존재들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만나면 서로를 알아볼 테고, 알아본다면 서로를 이해해 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른 에세이에서 그런 경험을 담아 글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연결된 우리’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케이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친구들과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는 그런 식의 연동이 꽤나 보편적인 현상이라 믿게 됐다. 소녀시대, 샤이니, NCT와 레드벨벳, BTS와 세븐틴을 시야에 담은 채 살아온 친구들이 들려주는 역사가, 그 역사가 세공한 성격과 취향이 나만큼이나 유난스럽고 빼곡한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국경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듯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아름다웠을 지난 시절을 전해 들으며, 은은한 기쁨 속에서 우리를 ‘우리’라 부르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이토록 평범한 내가 광장의 빛을 만들 때까지 | 최윤주 외)
같은 취향을 가진 이가 같은 결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단지 낭만적인 환상이 아니라 통계나 확률 뭐 그런 걸로 증명 가능한 과학적인 영역이라 생각한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와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이가 갖는 공통의 성향이란 것이 대강이라도 있지 않나. 각자가 다른 성향이기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음악을 좋아하면서 점점 더 다른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유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덕후들에게 당부의 말 한 가지를 하고 싶다. 취향이 누군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으며, 그 설명의 사각지대엔 때로 윤리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지금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며 웃고 떠드는 저 이가 반드시 선량한 존재라는 법은 없으니 너무 쉽게 믿지는 말라는 뜻이다.
괜한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여라도 연결감에 심취한 사람들이 순진한 믿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속거나 실망하는 일이 생길까 봐 하는 말이다. 최애가 같다는 사실은 의외로 팬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 때가 많으며 그 과정에서 피할 수도 있었던 갈등과 속임수가 벌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누굴 바보 취급하는 건가 싶을 수도 있는데, 내가 바로 그 바보였기에 꺼내는 얘기다.
- 2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