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 때문에 전으로 시작하는 그것을 당했다

취향이 선량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2)

by 최윤주

대학을 졸업하고 새 동네에서 살 집을 구할 때의 일이다. 같이 살 친구가 있어 원룸을 벗어날 계획이었고, 적당한 가격대와 적당한 크기, 적당한 질의 투룸을 월세로 구할 생각이었다. 물론 보증금도 월세도 싼데 둘이 방 하나씩은 가질 만한 멀쩡한 투룸 같은 것은 세상 일이 다 자기 좋을 대로 만만히 흘러갈 거란 착각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어서, 매물이 없었다. 그때 유머 감각은 좋지만 어딘가 신뢰가 가지 않는 중개인이 예정에 없던 전세 매물을 제안해 왔다. (이제는 ‘전세’라는 말만 들어도 어딘가 불길한 시절이 되었으나 그때는 대란이 있기 전이었다.)


우연히도 그는 아이유의 팬이었다. 차를 타고 매물을 보러 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아이유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 태교로 아이유 노래를 많이 들은 탓인지 딸이 꼭 아이유를 닮았다는 것, 그런데 그 딸이 이제 겨우 두 살 됐다는 둥의 이야기를 속사포로 전해 들었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신곡 <Blueming>이 연달아 히트를 친 직후라 세상 어딜 가도 아이유 이야기를 하던 때다. 중개인이 우연히 아이유의 팬이라고 한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니 아이유의 콘서트를 가봤다는 내게 그가 다음 콘서트는 꼭 함께 가자고 제안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친화력과 고객 응대 정신에 감탄했을 뿐이다.


그러나 익숙한 화제와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이 아주 은근하게 말랑해져가고 있던 것일까. 아님 중개인으로서 그의 프로페셔널함이 믿음직스러웠나. 그도 아니면 좋은 매물 상태에 혹했는지도 모르겠다(슬프지만 가진 돈이 없으면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 개연성 있으며 뒤탈이 없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네 번째 매물을 둘러볼 때쯤, 어느덧 나는 그에게 호의적인 입장이 되어 있었고 마침내 계약을 약속했다.


그러다 계약을 위해 재방문을 했을 때 결정적인 한 방이 날아왔다. 그는 중개인답게 쉴 새 없이 전화가 오곤 했는데, 벨소리가 발매된 지 일주일도 안 된 <마음을 드려요>(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OST)로 바뀌어 있던 것이다. 아이유가 오랜만에 OST 작업에 참여했다는 기사를 본 뒤 나도 몇 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곡이었다. 이렇게 발 빠르고 유난스러운 덕질이라니… 지난번에도 그의 벨소리는 아이유의 노래였다. 타이틀곡도 아닌 수록곡 <시간의 바깥>인 것이 귀에 밟혔지만, 설마 하니 차마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과 불확실로 가득한 계약 과정에서, 적어도 그가 아이유의 팬이라는 주장만큼은 사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아주 사소한 믿음 하나가, 끝내 중개인에 대한 믿음을 싹 틔었던 것 같다.


언젠가 들은 명언이 있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란 말은 틀렸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며 살아왔는데도 바보 같이 응용문제 앞에서 착각해 버렸다. 기부도 잘하고 인류와 사랑을 노래하는 아이유 팬이라면,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좀 극성맞아 보이는 ‘찐팬'이라면, 인간적으로도 믿을 만한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잊지 마! 아이유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아이유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국민 가수의 노래 몇 개 벨소리로 한다고 그게 뭘 담보하겠니. 아직 머리털도 덜 자란 애가 어떻게 아이유를 닮겠어. 이상하잖아…." 그러나 어리석고 천진난만한 과거의 나는 미래의 수신호를 듣지 못했고, 이쯤 되면 예상하겠지만, 나는 '유애나' 중개인이 소개해준 그 매물 덕에 몇 년 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전세 대란에 피해자 신분으로 동참하게 된다.


대체 취향이, 최애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도 무장해제시키는 걸까.


어쩌면 그에게 대단한 음모 같은 것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고의성 없이도 우르르 사건이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비슷한 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함부로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전세 문제가 반드시 악의가 얽힌 고의에 의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를 탓하려고 쓴 글은 아니다. (아, 정말 다행히도 행운을 닥닥 긁어모았는지 큰 손해 없이 무사히 해결되었다. 이 이상 불평불만을 했다간 왠지 부정탈 것 같아 말을 아낀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단순하고 경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고생 끝에 얻은 교훈 두 개만 공유하고 싶다. 하나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사소하고 인간적인 우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유(최애)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한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유가 특수한 면도 있다. 인기가 너무 많아 팬덤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별의별 사람이 존재하니 별의별 일이 일어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규모가 작은 팬덤 안에서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타인과의 교집합 앞에서 쉽게 말랑해지고, 그중에서도 덕후의 마음은 허물어지다시피 약해지곤 하니까. 그러나 최애가 같다고 무작정 믿지 말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의심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게 어쩌면 우리 자신의 도덕성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선량하다고 해서, 혹은 최애를 향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해서 그것이 우리의 선량함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가끔 보면, 팬도 최애도 그 사실을 잊는 것 같다. 우리는 앨범을 산 거지 면죄부를 산 게 아니다. 양손에 사랑을 가득 쥐고 있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유해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 사랑에 심취해 의심을 잊지 말자. 가끔씩 자정도 하고, 자중도 하자. 더 나은 덕질을 위해서, 더 나은 사랑과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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