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밑 머리카락이 주름이라는걸 알았을 때

늙어서 슬픈 그대에게

by 맴맴

그때의 충격은 내 인생에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 Top 10안에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이 충격은 대학생 때 어린아이에게 '이모'소리를 들었을 때 충격보다 크다. ( 그 순간의 상황이 슬로모션처럼 잊지 못한 걸 보면 이건 치료가 필요한 외상 후 스트레스가 분명하다 ㅠ).

하지만 눈 밑 머리카락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다 일어난 베개자국이 점심 커피 마실 때까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 나에게는 절대 없을 줄 알았던 흰머리가 어느덧 귀밑까지 자라있는 것을 알았을 때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열심히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울했다. 우아하게 나이 드는 게 꿈이자 다짐이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흰머리와 주름을 발견하게 된 순가부터 내 얼굴은 더 밉고 초라해 보였다. '아, 한때는 나도..." 풋풋하고 생기 넘치던 예전의 나를 떠올리니 지나간 세월이 더욱 야속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만 속상해하고 있을 순 없었다. 속상해할수록 얼굴은 더욱 속상해지는 상황, 그나마 남은 얼굴이라도 지켜야 했다.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적어보았다.

값비싼 화장품 바르기, 헤어숍 가기, 피부관리받기, 예쁜 옷 사기 등이 있었다. 일부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모두 순간적인 변신에 불과했지 생기 있던 그때로 되돌릴 순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얼굴, 기분 좋은 얼굴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잘 웃기'다.

웃는 게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 늘 얼굴 가리고 웃는 게 습관이었다. 또한 자칫 웃다가 치아에 낀 고춧가루라도 보일까 봐 입술도 꼭 다물고 웃곤 했다. 그래서인지 '잘 웃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나의 덧니를 보여줄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친한 지인들도 나를 알고 3년 정도는 지나야 나에게 덧니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서야 덧니와 함께 내 마음이 열리는 걸 수도 있다. 그만큼 나에게 덧니는 우리 엄마만 아시는 엉덩이 몽고반점 같은 은밀한 곳이었다. (아빠와 오빠는 아직도 모를 거라 확신한다;;)

그런 내가 용기 내어 덧니를 개방했다. 열에 아홉은 덧니가 있었다니 깜짝 놀라 했고, 아홉 중에 네 명은 덧니 때문에 더 귀여워 보인다고 매력 있다고 말해주었다.(매사에 긍정적인 그들은 분명 복 받을 거다) 그중 세명은 나의 덧니 따위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나머지 한 명은 정준하냐며 '이 덧니야!'하고 나를 놀려댔다. 그 한 명이 바로 내 남편이다. (다음 생에는 무조건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거다-_-)

어쨌든 덧니를 개방하고 나서 웃는 일은 훨씬 더 수월해졌고 편했다. 간혹 아저씨 혹은 전원주 선생님이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나의 웃음소리는 점차 힘 있고 화통해져 갔다.

얼굴이 더 예뻐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름이 없어졌다거나, 흰머리가 검은 머리로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전에 초라했다고 느꼈던 얼굴을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인 정도다. 그런데 '잘 웃기' 이후 확실하게 예뻐진 게 있다. 바로 눈동자다. 눈동자가 예뻐졌다. 더 깊은 흑갈색으로 동그래졌으며, 빤짝였다. 이 눈동자만큼은 왕년의 풋풋했던 시절과 전혀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예쁘게 농익어 가고 있었다.


순우리말 '얼굴'에 '얼'은 영혼, '굴'은 통로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즉 '얼굴'은 영혼의 통로다. 이 말을 빌려보자면, '얼굴'이 예뻐지기 위해서는 '나의 영혼이 예뻐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 여행하며, 혹은 일상에서 '영혼이 예쁜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삶의 방식과 태도가 천박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으면서도, 자신을 가꾸고 빛내면서도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난 아직도 예뻐지려면 멀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 눈동자가 얼마만큼 더 빛나고 깊어질지 생각하니 변화하는 외모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이 기분 그대로 거울 보며 와인 한 잔 해야겠다.

당신의 눈동자에 Cheers!

(이런 내게 남편이 벌써 정신줄 놓았냐며 이 덧니야! 외치는 장면이 눈에 선하지만 난 괜찮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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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피천득 수필 중에서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

맑고 시원한 눈, 낭랑한 음성, 처녀다운 또는 처녀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민활한 일솜씨, 생에 대한 희망과 환희, 건강한 여인이 발산하는, 특히 젊은 여인이 풍기는 싱싱한 맛.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나타나는 윤기, 분석할 수 없는 샘의 약동, 이런 것들이 여성의 미를 구성한다.

참다운 여성의 미는 이른 봄 같은 맑고 맑은 생명력에서 오는 것이다.

다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그런 것들이 미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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