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기독교인 그대에게
나에게 신앙은 평생 미뤄놓은 숙제다. 나는 독실한 부모님 밑에서 매주 일요일엔 교회를 가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교회는 내게 들어갈 때는 롯데월드 입장하는 것처럼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아 보였지만, 막상 들어가면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특히 교회에서 새로운 사람을 환영해 주는 시간을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바라보며 두 팔 벌려 환영의 찬송을 불러주곤 했는데, 이건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그 민망함을 견뎌내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도 나에겐 고난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애타게 찾았던 때도 그때다. 내가 처음 새로운 교회에 등록하였을 때 말이다. 백여 명의 사람들이 두 팔 벌려 처음 본 나를 향해 뻗으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주는데 속으로 '오 주여'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이렇게 애타게 주님을 찾게 하시다니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인 건 사실이다.
어릴 적 엄마는 오빠와 나에게 헌금으로 각 500원을 주셨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오빠는 문구점 앞 오락기에서 200원을 쓰고, 나는 과자를 사 먹곤 했다.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연년생 남매에게 일요일은 우리가 유일하게 의리로 뭉칠 수 있는 날이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는 200원의 자유를 즐겼고, 혹시나 200원이 300원이 될 때는 서로를 견제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사사로운 것까지 다 엄마에게 이르는 나였지만 이것만큼은 오빠가 죽을 듯이 미워도 엄마에겐 절대 비밀이었다. 오빠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다간 그땐 죽을 듯이 가 아니라 둘 다 죽는 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살아있고 비밀은 영원할 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후로 오빠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잠깐 불량 청소년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내가 수능에서 제일 잘하는 영어를 망친 것도 혹시 이때 먹은 과자 탓인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날 미워하지 않고 지켜주신다고 생각된 적이 있다. 바로 교통사고가 났을 때다. 아빠의 새 차가 폐차가 될 만큼 큰 교통사고였다. 다행히 나 말고 다친 사람은 없었다. (사실은 맨벽에 나 혼자 헤딩했다고 도저히 창피해서 입이 안 떨어지네^^^) 유리창에 금이 가고, 내 안경이 갈라지며 파편들이 날아가고 에어백이 터지는 그 순간, 벽이 내 코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 불과의 1초가 10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난 에어백과의 마찰로 인해 멍이 든 걸 제외하곤 멀쩡했다. 물론 그 후 트라우마로 운전을 못 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건 다 우리 엄마 기도 덕분이라고 나는 그때 처음 주님을 인정했다.
나는 늘 교회에서 그림자처럼 앉아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는 수많은 교회사람들에게 구원해야 할 어린양 이었다. 제발 아무도 나를 아는 척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더욱 나를 구원하려 애썼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교회와 멀어졌다.
매주 일요일 11시면 나는 교회가 아닌 교회 앞 스타벅스로 갔다. 꼭 교회 정문을 통과해서 주보 하나 슬쩍 챙겨 마치 방금 예배 끝나고 나온 사람처럼 스타벅스로 향했다. 그래야 엄마가 물어보셔도 '진짜 갔다'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고 증거로 주보를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순간 난 교회가 아닌 스타벅스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숙제 같은 신앙이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니 아이가 가졌으면 하는 첫 번째 유산이 되었다. 혹시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 아이가 혼자 남았을 때, 아이를 지켜주고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는 신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생기니 모든 것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하나님을 알고 믿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분의 말씀처럼 두려워말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식을 낳아보니 엄마의 잔소리가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된다. 분명 엄마는 신앙을 통해 행복하고 안도하고 매사에 감사한 삶을 살고 계실 거다. 그래서 엄마가 느낀 너무 좋은 것들을 내게도 꼭 알려주고 싶으셨을 거다.
나 역시 아이가 세상 여러 풍파를 겪을지라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메마른 땅을 풍요롭게 일궈가는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그 아이에게 바라는 첫 번째이자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다. 하지만 가진 게 있어야 물려주는 게 유산 아니던가. 나는 주님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주말이면 밑도 끝도 없이 교회에 가라는 엄마의 엄포와 협박이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주님에 대한 전부였다. (물론 예배를 드렸다면 알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요새 성경을 읽고 있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건 책이니까. 다른 서적 읽듯이 읽어 내려가고 있다. 책 읽는 거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내가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믿음에 대해 알고자 한다.
혹자가 그랬다. 성경은 완벽한 자기 계발서라고.
자기 계발서를 읽는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며 도전해 볼 만하다고 느껴졌다.
여전히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건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지난주에 한번 가볼까 교회 앞을 서성였으나 예전의 그 환영송이 떠올라 몸서리치며 다시 도망쳤고, 주말에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는 모른 척했다.
나의 이런 불편하고 무거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기뻐하고 쉬지 말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아무 걱정 없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만 해도 되는 걸까?
다음에 용기를 내어 교회에 간다면 그땐 눈 질끈 감고 정말 온전히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주 쉬워 보이지만 사실 항상 기뻐하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언제일지 확실히 알 순 없지만, 그의 보살핌은 반드시 우리 삶 곳곳에 드러난다.
이 세상 가장 높은 통치권자보다 높고 이 세상 가장 부유한 자보다 부유한 내가 너의 아빠란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절대 '돈'을 축복의 도구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그것을 혼자 온전히 누려도 하나님께서 책망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잠언 16:9)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