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저인플레, 저금리’의 일본 경제
1992년 7백 엔이었던 일본의 라멘 값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7백 엔이다. 맥도널드 빅맥 가격은 뉴욕 776엔(8,000원), 런던 531엔(5,500원), 서울이 442엔(4,600원)인데 비해 일본에서는 390엔(4,000원)이다. 1990년대까지 일본의 물가는 한국의 1.8배였는데, 과일, 야채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이제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일본이 더 싸졌다. 3%였던 소비세가 10%로 오르고, 전기료 등 일부 공공요금이 오른 이외에 일본의 물가는 30년 전과 변함이 없다. 환율,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 등으로 가격이 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품 가격은 제자리다.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 9월 18개월 만에 전년 동월 대비 플러스 0.1%로 전환되었다.
물가가 오르지 않고, 물가가 싸니 살기가 좋은 것이 아닐까? 천만의 말씀이다. 지나치게 낮은 물가상승률은 경제가 활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기업이 정당하게 제품 값을 올리지 못하니 돈을 벌지 못하고, 기업이 돈을 벌지 못하니 임금이 오르지 않고, 결과적으로 소비가 둔화되고 물가가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이른바 ‘재패니피케이션(일본화)’이라는 ‘저성장, 저인플레, 저금리’가 장기화되고 있다.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본
국가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수익이 확대되어야 하고, 근로자의 임금이 오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논리다. 아베 정부는 2012년부터 시작된 아베노믹스는 물가 상승을 유도됐다. 금융 완화로 엔화 약세를 유도하면 수출형 대기업이 성장하고, 낙수효과로 그 혜택이 연관된 중견 중소기업에 미쳐 근로자 임금이 상승해 가계가 윤택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결과는 임금과 물가는 오르지 않고, 엔화 약세만 지속되었다. 엔화 약세는 구매력 저하로 직결된다. 식료나 자원을 수입에 의지하는 일본은 엔화 약세로 수입 물가가 상승하니 생활에 직격탄이 된다. 거기에다 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황이 겹치면 살림살이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수입품을 이용해 상품을 제조하는 회사들은 엔화 약세의 영향으로 원자재비가 오른 것을 가격에 전가해야 했지만, 소비자들이 이탈할 것이 두려워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기업이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있었다. 2018년 쇠고기 덮밥 체인인 마츠야(松屋)가 주력 상품 중 하나인 '규메시(쇠고기 덮밥)' 가격을 30엔 올린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3개월간 매출이 3.3% 감소했다. 일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물가는 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서민 식당의 소비가 줄어든 것이다. 일본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소비자들이 가격 인상에 민감해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으로 수출기업도 이익 확보 어려워
기업들은 수입품 가격의 상승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지 못하니 당연히 수익에 압박을 받는다. 그러니 기업들은 상품 가격을 올리지 않기 위해 원가상승 요인을 외부에 전가하거나 임금을 올리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경제학적으로도 페어 프라이싱(fair pricing)의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노력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가가 상승하는 것은 가격에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가격 정체 특수성으로 일본으로 수출하는 기업들도 이익 확보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스텔스(stealth) 가격 인상도 문제가 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격은 바꾸지 않고, 과자 속 봉투를 전 보다 작게 하거나, 도시락 용기의 바닥을 올리는 방법으로 내용량을 줄이기도 하고 있다.
일평균 급여 433만 엔으로 3년 연속 하락
지난 9월 발표된 국세청의 ‘급여 실태 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일본의 평균 급여는 433만 엔으로 2019년의 436만 엔에 비해 0.8% 감소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20년 일본의 평균임금은 3만 8514달러로 OECD 35개 회원국 중 22위, 4만 1960달러로 19위였던 한국보다 낮은 것으로 발표했다. 작년에는 코로나 19 감염 확대로 급격한 경기침체도 있었지만, 일본인의 급여가 낮은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중소기업 컨설턴트 후지모토 요시미치(藤本義道) 씨 등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제조업 기반의 사고방식, 중소기업의 낮은 생산성, 인력 유동성 낮음, 급여의 상향 경직성, 노동조합의 약화, 비정규직 증가,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 내부유보 확보로 임금을 올리지 않는 경영자, 규제완화 지연이 가져온 임금 부진 등 복합적으로 보고 있다.
엔 약세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유가도 상승하고 있다. 연말에 유가 배럴당 1백 달러, US 달러당 환율 117엔의 어두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가격 인상을 두려워하는 기업들이 신상품 개발도 주저하고 있어 신상품 개발의 저조도 가중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자산과 주권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낮은 지가(地價)로 해외의 부동산 투자 자본 유입도 늘어나 2020년에는 전년대비 24%나 증가했다. 디지털화 지연으로 아마존, 구글을 비롯한 미국 내 거대 테크 자본들이 행정, 금융, 교육 등 일본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다.
지난주에 취임한 기시다(岸田文雄) 수상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에 의한 일본형의 자본주의를 구축해야 한다”며 중산층을 확대해 나갈 정책을 펴겠다고 한다. 지나치게 장기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체, 우리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