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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안천인 Nov 26. 2021

자판기가 라면도 끓여 드립니다.

진화하는 일본의 자판기(자동판매 시스템 기계)

사무실 주변에 못 보던 자판기가 새로 생겼다. ‘재미있는 자판기(おもしろ自販機)’라고 적혀 있다. 뭘 팔기에 재미있는 자판기라고 했을까? 자세히 보니 니이가타(新潟)에서 10월 말에 수확하여 도정한 햅쌀도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쓰면 좋을 것 같은 DIY 상품들이다. 여러 가지 색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쓰는 비누, 머리를 묶는 헤어 고무, 일본풍의 선물 포장용 색실 매듭 등 자판기 이름처럼 재미난 것들이 많다. 얼마나 팔릴까 싶기도 하지만, 가히 자판기 천국 일본임을 실감한다.


자판기(自販機)에서는 보통 청량음료를 판매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일본에서 청량음료 자판기는 전체 설치 대수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상품과 서비스는 수없이 많다. 지하철 역에 설치된 코인로커(coin+locker, 동전을 넣으면 열리게 된 수화물 보관용 로커)를 비롯해 환전기, 자동 정산기 등의 자동 서비스기, 담배 자판기, 티켓 발권기, 아이스크림, 낫토(納豆), 팝콘, 속옷, 전지, 신문, 꽃(생화), 우산 등 팔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마치 편의점의 취급 품목을 자판기에 다 옮겨 놓은 듯하다.

라면 끓여주는 자판기 등장

그런데, 최근 라면을 끓여주는 자판기가 등장해 화제다. 자판기가 라면을 끓여줘? 과연 맛이 있을까? 굳이 자판기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을 고객이 있을까? 그런데, 라면이 먹고 싶은 날씨 궂은날, 라면 가게가 멀고, 적당한 가격의 맛난 자판기 라면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를 노린 것이 미국 기업 ‘YoKai Express(요카이·익스프레스)’의 라면 자판기다. ‘요카이’는 일본어로 ‘요괴(妖怪)’라는 말이다. 요사스러운 귀신이니 섬찟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 회사 이름은 갑자기 나타나는 요괴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라는 비전을 담았다고 한다. 자판기 이름은 ‘Octo-chef(옥토 셰프)’. 이 자판기의 특징은 스팀을 이용해 라면을 조리하는 것이다. 터치 화면에서 메뉴를 선택하면, 컵에 든 냉동 라면을 스팀으로 가열해, 1분 정도면 완성된다. 컵라면과는 달리, ‘생(生)’에 가까운 맛을 제공하고 있어 호평이다.


유명 가게 라면 자판기도 인기


자판기 시장의 또 하나의 변화는 냉동식품 전용 자판기의 재등장이다. 그중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 유명 가게의 라면을 냉동시켜 판매하는 냉동 자판기 ‘누들 투어즈’다. 한 그릇 가격이 9백 엔에서 1천 엔으로 자판기 메뉴로는 꽤 비싼 편인데도 인기리에 팔린다고 한다. 비싼 배송료 때문에 통신판매로 구매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값이 싸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이후 식당에 가기가 꺼려지는 가운데 오피스 빌딩, 사원식당, 대학가 등에 설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편의점 증가로 삼각김밥 자판기 철수


사실, 오랫동안 ‘24hr. HOT MENU’라는 자판기가 인기가 있었다. 니치레이 푸드(ニチレイフーズ) 사가 1993년부터 서비스했던 소시지, 구운 삼각김밥, 감자튀김 등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판매하는 자판기였다. 고속도로 휴게소, 오피스 빌딩, 스포츠 시설, 공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니치레이가 이 자판기 사업을 접는다고 한다. 1990년대에 1 만 7천 개 정도였던 편의점 점포수가 이제 6만만여 개로 늘어나, 조금만 걸으면 편의점에서 따뜻한 도시락이나 삼각김밥을 살 수 있으니, 자판기에서 삼각김밥을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전력 소비량 70%나 줄어


이러한 자판기의 취급 상품 증가와 발전에는 기술력이 뒷받침되었다. 20년 동안 자판기의 에너지 효율이 높아져 전력 소비량은 70%나 줄었다고 한다.


판매 동향을 자동으로 분석하여 필요한 시간대에만 전기를 사용하는 자체 학습 에너지 절약형 기능이 생겼고, 곧 팔릴 것으로 예상되는 상품만 냉각 또는 가열하는 부분 냉각 가열시스템 기능도 추가되었다. 전기의 사용량이 많은 한여름 오후에는 냉각운전을 정지하여 발전소의 부담을 줄여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억제하는 피크 시프트(peak power load shifting) 시스템도 사용한다.


지열 등 자연의 열을 이용하여 전기 사용량을 줄여주는 히트펌프 기능을 갖춘 자판기도 등장했고, 낮과 밤, 주변의 밝기에 자동으로 대응하는 조명 센서를 부착한 자판기도 있다. 소재 연구도 활발하여 차거나 뜨거운 상품의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진공 단열소재도 채용한다.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주소 표시 스티커가 붙어 있어 현재 위치를 알려 주기도 하고, 지진 때는 무상으로 음료를 제공하는 재해 지원형 자판기, 자동심장충격기(AED)를 구비한 자판기도 있다.


무인 판매 트렌드 가속


일본에 자판기가 많은 것에는 높은 인구밀도와 부동산 가격, 비싼 인건비, 기업의 적극적인 자판기 무상 대여 마케팅, 기술력, 개인 중심의 와리캉(각자내기) 문화, 안전한 치안, 동전 문화 등 다양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코로나 19가 자판기, 무인 판매 트렌드를 더욱 증가시킬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자판기’. 옆에 상품을 설명하는 칠판을 세워 두었다.
이 자판기의 컨셉은 ‘직접 만들어 쓰는(DIY)’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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