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빵집은 대부분 대기업 프랜차이즈 아닌 개인 베이커리
“손님, 오늘은 어쩔 수 없어 드리지만, 다음부터는 예고 없이 이렇게 많이 사 가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다른 손님들이 사 가지 못하고, 그분들은 아침 식사를 못하게 됩니다. 많은 양이 필요하시면 전날 미리 연락을 주세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토요일 아침, 한 시간 정도 공원을 걸은 후 귀갓길에 아파트 부근의 ‘유카노 빵(ユッカのパン)’에 들렀다. 빵을 골라 쟁반에 담고 줄을 서 있는데, 주방에서 나오신 여 사장님께서 계산대 제일 앞에 서 있는 손님에게 안타까운 듯 부탁 같은 항의를 하신다. 그러고 보니 그 손님 앞에 큰 봉지 4개에 빵이 가득가득 담겨 있다. 이미 텅 빈 트레이도 있고, 판매대에 빵이 적어서 오늘은 특히 일찍 손님이 많이 오셨구나 했는데, 그 이유가 다른데 있었던 모양이다. 규모가 큰 빵집도 아니고, 재료가 준비되지 않아 더 굽지도 못할 텐데, 늦게 오는 손님들은 사지 못하던지 선택의 폭이 좁아지게 돼 버렸다.
서너 평 남짓한 좁은 가게 안에 들어서면 고소한 빵 냄새가 天仁을 행복하게 만든다. 유카노 빵은 아침 6시 30분에 문을 여는데, 늘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로 붐빈다. 갓 구워 낸 빵이 신선하고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적당해서 아주 인기가 많다. 주변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많다. 70대로 보이는 사장님 부부가 빵을 굽고, 따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두 분이 구운 빵을 내 오고, 번갈아 카운터를 담당한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주말 이틀과 수요일, 목요일 등 한 달의 반밖에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도 요즘은 빵을 식사 대용으로도 많이 먹지만, 일본인들은 빵 사랑은 정말 남다르다. 얼마 전 요양시설로 옮기신 89세의 507호 하라다(原田) 할머니도 빵을 즐겨 드셨다. “어릴 때부터 빵과 스테이크 등 서양식 요리를 많이 먹어서 위화감이 없다”라고 하셨다. 서울로 이주한 히마리도 아침식사로 늘 빵을 먹곤 했다. 사실 히마리는 아침에 먹는 빵이 그다지 맛있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히마리 엄마 혼자서 2살 쌍둥이 동생들까지, 아이 3명에게 밥을 먹여 어린이 집에 보내야 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히마리가 주말에 天仁네에 놀러 오면 계란말이, 떡국, 치즈, 두부구이, 과일 등 탄수화물이 적고, 히마리가 좋아하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챙겨 먹이곤 했다.
하라다 할머니처럼 연세 많은 분들도 빵과 스테이크, 햄버거, 파스타 등의 서양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일본의 빵 역사가 길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개화가 빨랐기 때문이다. 일본에 빵이 전해진 것은 1543년이다. 표류 끝에 일본에 닿은 포르투갈의 배가 총과 함께 빵을 가져오면서 일본에도 빵이 전해졌다. 그래서 ‘빵’이라는 이름도 포르투갈어 pão를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17C 쇄국령으로 빵 소비는 뜸했다가 1840년 아편 전쟁 때 영국군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비상식량으로 빵을 준비하면서 다시 빵을 먹기 시작한다. 이후 개화한 일본에서는 급속하게 빵 문화가 자리 잡았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식량난에 원조 물자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빵은 일본인의 일상에 완전히 스며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제과 제빵 학교에 유학 오시는 분들이 많다. 일본에 유학을 오는 것은 제빵학교 전문성이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일본인의 취향에 맞춘 빵을 다양하게 개발하는 개인 베이커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빵은 '팥빵'이다. 팥빵은 1869년 기무라야(木村屋) 창업자가 고안했다. 그 역사와 명성 때문에 긴자(銀座) 욘초메(4丁目)의 기무라야 본점에서는 지금도 줄을 서서 빵을 산다. 1900년에는 과일 잼을 빵 안에 넣은 '잼빵', 슈크림에서 고안한 '크림빵' 등이 탄생한다. 1927년에는 카레를 빵 반죽으로 감싸 기름에 튀긴 '카레 빵'도 등장했다. 쿠키 반죽을 빵 위에 얹어서 굽는 '멜론 빵'이나, 소라 같은 모양에 그 비어 있는 안쪽 부분에 크림을 채운 '코로네(소라빵)' 등도 오래전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에서 개발된 빵이다.
일본의 빵 제조업체와 유통 구조는 우리나라와 좀 다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전체 빵집 수의 절반, 매출액의 60%를 넘는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와 반대로 빵 시장의 60%가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홀세일(wholesale) 제빵업체의 빵이다. 이들 빵은 마트와 편의점을 통해서 유통된다. 홀세일 제빵 업계 1위의 야마자키제빵(山崎製パン)의 연간 매출액은 9,805억 엔, 우리 돈으로 약 10조 원, 일본 전체 빵 시장의 7% 정도나 된다. '유카노 빵' 같은 개인 베이커리도 전체 빵 판매액의 23%나 되는데, 가게 수는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나라처럼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아니어서 집집마다 간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는 어느 매장에 가더라도 동일한 맛의 제품을 구할 수 있는 장점도 있겠지만, 역으로 신선도가 떨어지고 동시에 개성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역시 개인 베이커리, 이른바 동네 빵집이 더 좋다. 개인 베이커리는 신선하고, 사용하는 효모의 종류, 만드는 빵의 종류, 방법, 맛과 특징이 집집마다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제빵사, 점주의 정성이 더 들어가 사람 사는 인정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개인 베이커리도 경영 사정이 어려워 최근 폐점한 곳도 많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 가정의 빵 소비는 늘어났지만, 대형 마트들이 직접 빵을 구워 판매하는 베이커리 코너를 신설하는 곳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天仁은 더더욱 유키노 빵 같은 동네 빵집을 찾는다.
天仁네 사무실 부근에는 유명 빵집이 몇 군데 있다. 고급 식빵 붐을 타고 알칼리 이온수로 식빵을 만들어 히트한 긴자니시가와(銀座に志かわ) 본점과 소금빵의 원조로 유명한 메종 긴자점도 있다. 가게 앞에 늘 줄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경기가 좋지는 않지만 건투하고 계신 모양이다. 간혹 점심 식사 후 산보를 하며 지나다 보면, 도서 '퇴사준비생의 도쿄'에도 소개된 바 있는 유락쵸역(有楽町駅) 부근의 'Center the bakery'의 인기는 여전한 것 같다. 또, Boulangerie Bistro EPEE, breadworks 오모테산도, The Little BAKERY Tokyo, 365日, FRAU KRUMM 등등 도쿄에는 개성 있고 맛있는 개인 베이커리, 빵집이 곳곳에 있다.
키치조지(吉祥寺) 역 부근에 있는 'Boulangerie Bistro EPEE'는 天仁도 자주 들리는 곳이다.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 프랑스 요리뿐만 아니라 갓 구운 빵을 리필해 주는 빵 안주도 있어 식사 겸 한 잔 마시기 좋은 베이커리 카페다. 하루 50개만 만드는 식빵도 아주 부드럽고, 맛있어 미리 주문해 놓아야 살 수 있을 정도로 인기다. 지난주에는 인건비와 비용은 더 들어가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의 빵을 굽지 않고, 하루 4번에 나누어 신선한 빵을 구워내는 지방의 베이커리가 지상파 TV에 소개되기도 했다.
히마리와 놀면서 유카노 빵집뿐만 아니라 도서관 옆의 케이크가 맛난 샤토레제에도 자주 갔었다. 착한 히마리는 진열대 안의 케이크를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생일 때 사 달라며 늘 푸딩만 한 개 집어 들었다. 주변을 지날 때면 늘 히마리와의 추억이 떠 오른다. 10월, 히마리의 5번째 생일에는 맛 난 케이크를 사 들고 서울에 다녀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