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火山のふもとで』 松家仁之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났다. (夏の家では、先生がいちばんの早起きだった)"
첫 문장의 묘사가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펼쳐 든 느낌이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 바로 다음 문장이 바로 궁금해진다. 마쓰이에 마사시(松家仁之)의 소설, 『火山のふもとで,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첫 구절이다.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초등학교 친구 경신이의 밴드 포스팅이 계기였다. 天仁의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 130여 명은 ‘네이버 밴드'를 만들어 온라인에서 자주 만나고 있다. 밴드에서는 오프라인 모임 소식뿐만 아니라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 경조사도 공유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겹고, 좋은 소식들이 올라온다. 天仁도 간혹 『인사이트 재팬』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소식을 전한다. ‘인사이트 재팬'은 두둑손 인제가 추천해 준 제목이다. 경신이는 연극, 영화, 뮤지컬, 맛집과 독서 토론회 후기를 자주 올리는 열혈 멤버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토 후기가 아니라, “책을 읽기도 전에 주문 완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도착했습니다"라는 포스팅을 했다. 장난처럼 “읽고 난 뒤 퍼뜩 후기를 올려달라”라고 했더니, 댓글로 天仁을 소환했다.
"같이 읽으면 안 되겠니?”
소설이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고, 원작이 일본에서 출간된 책이니 함께 읽자는 뜻일 테다. “읽고 난 뒤 동시에 후기를 올리거나 온라인 독서토론회를 하자"라고 한다. 일본에서 일을 하니 매일 일본말을 하고, 일본어 자료와 책을 읽지만, 일본어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의 처음 제안이라 응하기로 했다. 서울과 도쿄, 서로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책을 함께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2012년에 출간된 책이라, 먼저 교바시 도서관(京橋図書館)에 책이 있는지 검색해 봤다. 마침 책을 1권 소장하고 있는데 대출 중이다. “대출 중이라 예약했다. 예약 1순위"라고 밴드에 댓글을 달았더니 곧바로 사진과 함께 “조정래 선생의 ‘천년의 질문’을 먼저 읽으며 기다리겠다"라는 답글이 달렸다. 건강관리도, 직장 생활도, 등산도, 문화활동도, 책 읽기도 아주 열심인 친구다.
경신이가 “곧 강하게 다가 올여름을 대비하여~”라며 친구들에게 책 읽기를 권했던데 어떤 책인지 궁금하다. 책을 받아보려면 1~2주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책을 발행한 출판사 신초사(新潮社)의 홈페이지에 먼저 들어가 보았다. 일본의 출판사나 서점들은 한국에 비해 책 소개에 매우 인색하다. 작가의 프로필이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방문했는데, 의외로 간단한 책 광고(*주 1)와 함께 프리뷰를 5쪽이나 올려놓았다. 대박이다.
"나는 현관 바로 위에 있는 침대 딸린 서고에서 지내고 있었다. 새벽녘, 침대 아래 바닥에서 덜컹거리듯 희미한 소리가 오래된 나무 기둥과 벽을 기어오르듯 들려온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현관 안쪽에 걸려 있는 버팀목을 떼어 벽에 기대어 세우는 소리다. 선생님은 산책을 나가신 것 같다. 밤사이 숲에서 식혀진 공기가 방충망 너머로 천천히 들어온다. 여름 별장은 다시 고요해진다. " (*주 2, 天仁의 번역)
여류 작가의 작품처럼 묘사가 매우 섬세하다. 마치 읽고 있는 天仁이 등장인물이 된 것 같다. 아침이 밝아오는 현장에 가 있는 듯 머릿속에서 소설 속의 광경이 그려진다. 天仁이 좋아하는 소설가, 김설원 작가님의 글을 대하는 듯하다. 한 구절을 더 읽어본다.
"해뜨기 조금 전부터 하늘은 이상한 푸른빛을 띠었고, 모든 것을 삼키던 깊은 어둠에서 숲의 윤곽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일출 시각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금방 밝아진다. 침대를 빠져나와 안뜰을 향해 있는 작은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린다. 어느새 어디서 솟아났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움직이고 있다. 조용했다. 창문을 열고 코를 내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흰색이 아니라 녹색이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다른 직원들도 일어날 것이다."(*주 3)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시처럼 아름답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읽으면 문장력도 쑥쑥 좋아질 것 같다. 그런데, 사실 天仁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다. 소설도 마치 天仁의 지론인 간결한 보고서 ‘1 page proposal’이나, 경영, 마케팅 서적처럼 후다닥 핵심 요점만 파악하고, 요약해 버리려고 한다. 그러니 소설의 상세한 묘사들은 적당히 뛰어 넘어가게 된다. 장면 묘사가 소설의 핵심 내용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툭툭 던져진 것 같지만 한 구절, 한 문장이 아름답고 섬세해, 그 묘미를 느껴 가면서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다.
일본어 원서의 제목 '火山のふもとで'는 직역하면, '화산 기슭에서'나 ‘화산 자락에서' 정도가 되겠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다. 마쓰이에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원제목보다 한국어판 제목이 훨씬 좋다. 원제목은 아마 이 소설의 주 무대가, 활화산이 있는 아사마산(浅間山) 자락의 가루이자와라 그리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루이자와 대학촌'이라고 하면 일본인들에게도 ‘아사마산 자락’ 보다는 ‘황실의 여름 휴양지, 별장, 선선함, 가루이자와 72 골프 토너먼트'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 오른다. 재해,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화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제목은 정말 중요하다. 만약 한국에서도 원제목대로 출간했다면 책이 많이 읽히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天仁에게 '가루이자와'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회사 소속의 프로님, JLPGA 투어에 참가 중인 한국 여자 프로골퍼님 들과 매년 일본의 추석인 오봉야스미 기간 중에 열리는 JLPGA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가루이자와 대학촌의 별장에서 함께 숙식하곤 했는데, 天仁도 통역, 매니저 자격으로 동행한다. 시합이 열리는 8월 중순의 한낮에는 가루이자와도 역시 덥지만, 그래도 도쿄 기온보다 10도는 낮은 선선한 날씨다. 별장에서는 저녁에 전기장판이나 빼치카에 불을 넣어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다. 돌아가신 회장님을 모시고 매년 미츠비시상사, 아사히카세이 등 3 개사의 대표, 관계 부서 임원들과 연례회의를 겸한 친선모임 행사에도 참여했었다. 회의 중에는 손님들께 신경을 쓰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공식 행사가 끝난 후, 3개사 간사들과 함께하던 프린스호텔의 와규(和牛) 스테이크와 와인 맛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친구 덕분에 명작 소설을 한 권 만난 것 같다. 사회인이 되어 일본어를 배운 天仁에게 일본어 소설을 읽는 것은 경영, 경제 등의 비즈니스 전문 도서를 읽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소설은 한눈에 의미가 쏙 들어오는 한자보다 풀어쓴 히라가나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天仁이 평소 비즈니스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들도 툭툭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377쪽의 꽤 긴 장편이다. 문제는 술이다. 가능한 퇴근 하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 반납 기간 내에 촘촘히 다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프리뷰 5쪽만 읽었는데도 글에서 짙은 초록색 나무향기가 난다. 신선한 공기, 녹음 짙은 가루이자와 대학촌의 추억이 떠 올라서일까? 아직 책을 받지도, 읽지도 않았는데 말이 너무 앞섰다.
PS.)
사실, 작가의 이름 '松家仁之'는 '마쓰이에 마사시'가 아니라 '마쯔이에(또는 마츠이에) 마사시'라고 읽는 것이 옳다. 우리나라의 외국어 표기법에 '된소리'를 적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원 발음과는 다르다. '마쓰이에'라고 하면 일본인들은 '増家' 또는 '升家' 등 전혀 다른 한자, 다른 말로 알아듣는다.
일본인 성씨 중에서 '마쯔다(松田まつだ)'와 '마쓰다(増田ますだ)'가 있다. 우리는 모두 '마쓰다'로 적지만, 사실 전혀 다른 성이고, 읽는 발음도 다르다. 실제 있었던 일화인데, 한국식 발음이 입에 익은 지인이 마쯔다(松田) 씨 사무실에 전화해서 실수로 ‘마쓰다' 씨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저희 회사에 마쓰다(増田)라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답이 곧바로 나오더라고 한다.
일본어는 발음할 수 있는 것이 1백여 개 밖에 되지 않아 맥도널드를 '마쿠도나루도(マクドナルド)'라고 적는다. 이에 비해,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발음의 폭이 넓은 문자다. 한글은 단모음 10개, 중모음이 11개이고 실제로 적을 수 있는 음절 수가 약 3천 개나 된다. 좀 더 본래의 발음에 가깝도록 외래어 표기규칙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주)
1. 출판사의 광고 내용
"중요한 것은, 놓쳐 버릴 정도로 평범한 말로 이야기된다-. 주목받는 대형 신인의 데뷔 장편!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났다.'
이야기는 1982년 여름, 10년 만에 분화한 아사마산(浅間山) 자락의 별장에서 시작된다.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공모전의 경쟁, 젊은 건축가의 은근한 사랑을, 이 집과 이 땅으로 흘러간 수많은 시간이 감싼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도쿄, 교도통신 외 각 신문 문예시평에서 화제 폭발! 가슴 깊은 곳을, 조용하면서도 깊게 떨리게 하는 신선한 데뷔 장편.
大事なことは、聞き逃してしまうほど平凡な言葉で語られる――。注目の大型新人によるデビュー長篇!「夏の家」では、先生がいちばんの早起きだった――。物語は1982年夏、10年ぶりに噴火した浅間山のふもとの山荘ではじまる。国立現代図書館設計コンペの闘いと若き建築家のひそやかな恋を、この家とこの土地に流れた幾層もの時間が包みこむ。朝日、毎日、読売、東京、共同ほか各紙文芸時評で話題沸騰!胸の奥底を静かに深く震わせる、鮮烈な デビュー長篇。
2. 일본어 원문
玄関の真上にあるベットつきの書庫で、ぼくは寝起きしていた。明け方、ベッドの下の床から、古い木造の柱と壁をはいあがるようにして、ごとごとと空えめなくぐもった音が伝わってくる。それは、玄関の内側にかけてある心張り棒を外して、壁に立てかけている音だ。
先生は散歩に出ていったようだ。夜の森で冷やされた空気が、網戸ごしにゆっくり入り込んでくる。「夏の家」はまた静まりかえる。
3. 일본어 원문
日の出のしばらく前から空は不思議な青みをおび、すべてをのみこんでいた深い闇から森の輪郭がみるみるうちに浮かびあがってくる。日の出の時刻を待たずに、朝はあっけなく明けてゆく。ベッドを抜けだして中庭に面した小さな窓のブラインドをあげる。いつの間に、どこから湧きだしたのか、白いかたまりが桂の枝や葉をゆっくり撫でながら動いている。静かだった。窓をあけて鼻をつきだすように顔を出し、霧の匂いをかぐ。霧の匂いに色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白ではなく緑だ。あと一時間もすればほかのスタッフも起きだしてくるはず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