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받던 죠센징이 일본에 정착시킨 자랑스러운 음식문화
미즈모토 공원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야키니쿠(焼肉, 갈비, 화로구이)를 먹었다. 가게마다 고기를 재는 양념 맛이 다르기는 하지만 재일교포가 경영하는 야키니쿠야(焼肉屋, 갈빗집)의 고기와 반찬은 특히 더 맛이 있다.
일본의 육식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675년 덴무 왕이 살생 금단령을 내리면서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19세기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인들이 들어오면서 다시 먹기 시작했다. ‘체격이 좋은 서양사람들처럼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문명 개화론으로 육식이 전면 허용되고, 장려된 것이다. 1945년 패전 후의 일본은 먹을 것이 부족했고, 일반 국민들은 돈도 없었던 혼란기였다. 그래서 소고기는 매우 귀했다. 일본말로 고기는 니쿠(肉), 소고기는 규니쿠(牛肉), 돼지고기는 부타니쿠(豚肉)라고 한다.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니쿠(肉)라고 하면 부타니쿠, 즉 돼지고기를 뜻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패전 후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귀국하지 못한 재일교포들은 한국식으로 고기를 구워 먹는 야키니쿠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버려지는 소 내장으로는 호루몽 야키(ホルモン焼, 곱창, 대창구이)라는 싸고 맛있는 요리로 상품화했다. 호루몽이란 오사카 사투리인 ‘버리는 것’이란 뜻이다. 일본 사람들이 먹지 않고 그냥 버리는 내장을 교포들이 주워 와서 구워 먹었기 때문에 곱창이 호루몽야키로 정착된 것이다. 그 역사는 일반 대중들이 많이 모이던, 생활용품 암시장 오사카의 츠루하시(鶴橋)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야키니쿠 거리로 번성하게 되었다. 야키니쿠와 호루몽 야키는 재일교포가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재일교포의 문화며, 역사다.
야키니쿠는 LA갈비처럼 간장 양념으로 간을 하고, 구운 다음에 타레(간장소스)에 찍어 먹는다. 우리나라의 갈비와는 요리 방법이 다소 다르다.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만들어 낸 독창적인 음식문화이기도 하지만, 갈비를 굳이 야키니쿠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일동포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야키니쿠야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인, 기업들이 참여하며 대중화되어 이젠 하나의 음식문화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야키니쿠야에 가더라도 김치, 갈비, 상추, 나물 등은 용어는 한국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야키 니쿠야는 주로 밤에만 영업을 해서 이자카야(선술집)라는 인식이 강하고, 김치, 나물 등 반찬 값을 별도로 받는 것도 우리의 음식문화이지만 우리의 음식문화와는 다른 일본에 현지화된 음식문화다.
지금은 비교적 차별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 재일교포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재일교포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본 사람들이 잘하지 않는 야키니쿠야(焼肉屋), 파칭코, 고물상 등의 자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교포 2세가 초일류 동경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직을 못해,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1970년 대 재일교포가 히타치를 상대로 한 취업차별 소송에서 이긴 이후 2세, 3세들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비교적 줄어들었다. 한국과의 무역 거래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오히려 교포들을 채용하는 대기업도 많아졌다.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서 피눈물로 사업을 성공시킨 교포들은 이제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파칭코 수요가 줄어들면서 수천 억대의 자산을 재투자할 신규사업 발굴하는 것, 대형 프랜차이즈들과 경쟁하면서 교포의 독창적인 야키니쿠 문화를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다. 지금도 재일교포 30만여 명은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우리 국적을 유지하는 일본법상 ‘특별 영주자’들이다. 그들이 늘 행운과 함께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