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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슬로우 Jan 30. 2021

[부록] 웃기는 이데아와 메타포

북홀릭

매일 스타트업과 브런치. 131 day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1,2편의 부제는 각각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이다. 제목이 그럴싸해서 엄청나게 철학적인 주제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어이없게도.. 아니 웃기게도..1편에는 '이데아'와 2편에는 '메타포'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것도 미니마우스나 미키마우스같이 60cm ~70cm의 미니한 사이즈의 유령캐릭터로... 너무 확~ 깨는 설정 때문에 하루끼한테 우롱당한 것 같은 기분..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즈음엔 이 책을 뭣하러.. 끝까지 뭘 기대하고 읽었나 허무감이 몰려오는데, 생각해보면 항상 허무주의적인 분위기였던 하루키 월드.. 이렇게 독자가 허탈감 느끼도록 의도했나 싶은 생각마저도 든다. 아. 허무해. 이 책에서 나는 대체 무얼 기대했던가.. 



recipe 202.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하지만 이 책에서 스토리가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연관성이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계는 단지 이데아의 모방 혹은 재현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것이 플라톤의 사상인데, 이 책 속 주인공이 겪는 현실 속에서는 매번 어떤 사건의 '재현'이 반복되어 일어난다. 


우선 친구의 아버지 도모히코 작가가 그린 '기사단장 죽이기'의 그림은 나치 암살을 은유하는 그림으로, 책 후반 부분에 가면 실제로 주인공이 현실에서 기사단장을 죽이는 사건이 '재현'되어 일어난다. 게다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 역시 원래는 오페라 '돈조반니' 이야기 속의 사건을 일본화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 속의 기사단장은 꼭 그림 속 사이즈만큼이나 작은 미니어쳐 유령인 '이데아'로 주인공의 현실에서 '재현'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의 직업이자, 그가 그리는 '초상화'도 사실은 누군가를 캔버스 위에 '재현'하는 일이다.   




이렇게 이 책에는 무언가 원형의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복제'하고, '재현'하는 일들이 무수하게 기묘한 형태로 일어난다.  


멘시키가 수수께끼의 구덩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칠흙같은 죽음을 몸소 경험하는데, 이후 실제로 주인공도 그 구덩이에 스스로 갇히는 기묘한 경험을 '재현'하게 되고, 멘시키가 '그때 그 구덩이에서 혹시 나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냐'라는 질문을 주인공에게 집요하게 던지는데, 주인공은 '결코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 이후 언젠가 여행 중에 만난 여자와의 잠자리에서 그녀를 수건으로 목조르던 순간의 손의 감각과 기억이 되살아나며 자기 안에 있는 살인충동에 대한 경험 또한 '재현'하게 된다. 


또한, 멘시키가 일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된 신비한 경험처럼, 주인공도 이혼한 아내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또 '재현'하게 된다. 


어쩌면, 죽은 여동생이 멘시키의 딸로'재현'하여 태어난 것 같기도 한 것이,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 때문에서인지 주인공은 실종된 멘시키의 딸을 살려내기 위해 이데아(기사단장)를 살해하라는 명령도 기꺼이 수행하고, 메타포(긴 얼굴)를 따라 내려간 맨홀 뚜껑 아래 세상에서 모진 모험을 하게 된다. 


그 모진 모험은 일종의 은유적인, 즉 메타포적인 모험으로 주인공의 내면으로의 탐험같은 느낌이다. 마음 속 깊고 깊은 동굴로 들어가 마주하기 힘든 오랜 기억과 상처를 마주하고, 그러고 난 후에야 어둠 속에서 마침내 빛이 비추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그 과정을 뚫고 나온 감내한 후에야 드디어 멘시키의 딸이 살아서 돌아온다.  


주인공의 현실 속에서는 이렇게 사건의 '재현'과 '은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하루키의 서술 방식은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거나 진지하거나 하지는 않다. 일부러 독자에게, 이데아나 메타포라는 관념을 괜히 심각하게 말고 가볍게 받아들이라는 듯이, 미니어쳐 캐릭터로 '이데아(기사단장)'와 '메타포(긴 얼굴)'를 구상해내었으니.. 그냥 독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미스터리한 스토리에 푹빠져 흥미롭게 '시간 죽이기'를 하면서 슥슥 읽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 참고할 서평 관련 방송

http://www.podbbang.com/ch/14172?e=22564718 



목표일: 131/365 days

리서치: 202/524 reci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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