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슬로우 Aug 07. 2021

[부록] 경계를 무화시키기

책읽는 주말

매일 스타트업과 브런치. 141 day


나는 직관이 발달해 가끔 무언가를 보지 않아도 아는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성숙했다고 할 수는 없고, 나이가 들어갈 수록 경험이 많아져서 점점 직관이 발달했다기 보다는, 타고나기를 의식의 고양을 잘 느끼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집중력이 높아서 명상의 상태에 들면 그 상태에 몰입이 되는 강도가 강한데, 그 상태에 들어가기를 그다지 원하지는 않는다. 의식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아주 낮은 속물적인 단계부터 승화된 상태까지를 오르내리기 번복한다. 한번 고양 상태를 경험했다고 항상 의식의 레벨이 높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초탈해있다가도 어떤 생각 하나에 사로잡히고 말 때는 한없이 하강하고 욕망의 굴레에 뒹굴고 만다. 그래서 현자가 되지 못하는 법.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즉, 고행이며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끊임없는 연마가... 필요한 것을..      



recipe 218. 켄 윌버 '무경계'

켄 윌버는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23세라는 어린 나이에 동서양의 심리학이나 철학, 신비사상, 전통적인 수행법 등을 모두 통달하여 통합이론을 발전시켜 인간의식 연구의 패러다임을 종합한 책 '의식의 스펙트럼'을 썼다.


무엇보다 그의 강점은 '통합'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조각조각 배웠던 온갖 사상이나 학파들의 주장들이 각기 상호모순되는 부분 때문에 무엇이 정답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고, 서로 고통의 원인을 다르게 분석할 뿐만 아니라 처방도 제각기 다르며 심리학자의 견해와 영적 이론들이 서로 전적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아 혼란스러워서.. 마음 공부 좀 해볼려고 했더니 그만 때리치워야겠다.. 포기하고 그냥 고통받고 살련다... 라며 좌절했었다. 그런 나에게 왜 그렇게 각각 해법이 다른지를 이해시켜 주었다.    


출처: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15



그는 다종다양한 관점들을 큰 그림으로 조망하여 하나의 궤로,  '통합'하여 한큐에 정리해준다. 우리의 의식의 스펙트럼을. 각기 다른 처방들과 각기 다른 학파의 주장들은 의식의 스펙트럼 상의 각기 다른 단계별로 적용이 되는 것으로, 지금 나의 의식의 스펙트럼 상태가 어디에 속하는 지를 알게 되면 그에 맞는 처방책을 내가 직접 찾아나설 수도 있겠다는 역발상을 제공한다.   


도표상에서 보면, 경계지음 자체가 없는 상태가 최고조의 합일의식 상태인데, 그 수준은 아주 순간적인 찰나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절대 닿지 않을 의식 저 너무에 멀리 있는 듯 한다. 그 수준까지는 아직 내가 도달하기는 무리일 것 같고, 초개아적인 나(주시자가 되기), 즉, 전유기체 수준에만 머물러도 이 세상은, 나의 삶은 수많은 투쟁과 전쟁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사실 대상과의 '경계를 지음'으로써 생기는 것으로, 그 경계지음으로 인한 소외와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내면의 투쟁이 우리가 힘들어하는 고통의 발로가 된다.






p. 214

켄타우로스 자각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보여지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보는 자가 아니다. 내 몸은 피곤하거나 흥분하기도 하고, 아프거나 건강하기도 하고, 무겁거나 가볍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내면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이런저런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나의 욕망들을 알 수 있는데,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아는 자가 아니다. 욕망들은 오고가면서 내 자각을 통해 흘러가지만, 그런 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나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데, 느껴지고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느끼는 자가 아니다. 감정들은 나를 통해 스쳐가지만, 그런 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나의 생각들을 알 수 있고 직관할 수 있는데,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아는 자가 아니다. 생각들은 나에게 오고 나에게서 떠나가지만, 그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수없이 반복하여 위의 문구들을 암송하다 보면 내면의 자유로움, 가벼움, 해방감, 안정감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태풍의 중심인 이 근원은 주변에서 사납게 휘몰아치는 불안과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투명한 고요함을 유지할 것이다. 이 '주시하는 중심'의 발견은 폭풍우치는 바다 표면 위의 파도로부터 고요하고 안전한 해저의 심연으로 잠수하는 것과 흡사하다.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목표일: 141/365 days

리서치: 218/524 recipes

매거진의 이전글 [부록] 맨디블 가족으로 본 미국의 몰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