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버킷리스트를 갖고 있다. 다만, 그걸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정리해서 하나씩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전자에 가깝다. 주기적으로(대략 몇 년에 한 번씩) 버킷리스트를 엑셀로 정리해서 달성한 내용과 변경된 내용을 수정한다.
여행을 좋아하기에 30여 개쯤 되는 내 버킷리스트의 대부분은 여행과 관련된 항목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80일간의 세계일주 하기, 6대주 다 방문해 보기, 7대 불가사의 방문하기, 영국 프리미어리그 직관하기 등이다. 물론 이 중에는 정말 현실성이 없어서 실현이 불가능한 목록들도 꽤 많다.
또한, 다소 이색적인 것들도 있는데, 헌혈 100회 하기, 책 3권 출간하기, 자산 OOO 모으기, 롤스로이스 차주 되기 등이다.
오늘은 내 버킷리스트 중에서 작년에 달성한 조금은 특이한 버킷리스트 달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릴 적부터 로망 중에 하나가 은행 개인 대여 금고를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여 금고에 프라이빗하게 들어가서 중요한 물건을 넣어놓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너무 멋있어 보이고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서인지, 나는 은행 대여금고를 꼭 사용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흙수저 출신이다. 부모님에 물려받은 재산은커녕 오히려 사회초년생일 때 부모님이 벌려놓은 각종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히, 30세 즈음에 결혼하고 맞벌이를 하면서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준히 자산을 불려 가서 이제 대한민국 평균 정도는 되는 자산을 형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의 주거래 은행(주거래 은행이라고 해봤자 입출금 통장 하나에 월 10만 원 넣는 적금 통장 하나 있는 정도)은 원래 신한은행이다. 하지만, 집 근처 신한은행에는 대여금고가 없었기에 검색하던 중 집 근처 하나은행에 대여 금고가 있었다.
뭔가에 꽂히면 바로 실천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나는 바로 하나은행 해당 지점으로 전화를 했다.
"은행 개인 대여 금고를 사용하고 싶어요."
"저희 은행 VIP만 가능합니다."
"VIP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점마다 다르지만, 저희 지점은 최소 3억 원 이상의 자산을 저희 지점에 맡기셔야 합니다."
여기서 좌절.. 대한민국 평균 자산을 가진 내가.. 그것도 집 하나 대출 끼고 갖고 있는 게 자산의 거의 전부인 내가.. 3억이라는 현금이 있겠는가? 그나마 조금씩 모으던 현금도 미국 지수추종 ETF에 꾸준히 넣고 있는 푼 돈이 전부이지 그 큰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좌절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행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퇴직연금을 하나은행으로 이전하면 가능할까요?"
갑자기 하나은행 직원의 목소리가 밝아지는 것이 전화 넘어서에도 느껴졌다. 나는 뭔가 가능성을 봤다.
사실, 최근 경제 뉴스를 보면서 은행들이 퇴직연금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다고 들어서 왠지 퇴직연금을 이전한다고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시도해 본 것이다.
직원의 답변이 이어졌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퇴직연금 최소 1억 이상은 이전해주셔야 하는데 금액이 어떻게 될까요?"
3억의 허들이 갑자기 1억으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퇴직하면서 1억이 약간 넘는 퇴직 연금을 수령해서 바로 찾지 않고 삼성증권 퇴직연금 계좌에 고이 모셔두고 미국 지수 추종 ETF를 사놓았던 상황이라 가뿐하게 1억이 넘는 퇴직연금을 갖고 있었다.
나는 개인 대여 금고가 가능하다는 말에 당장 신분증을 챙겨 들고, 하나은행으로 향했다.
내가 방문한 하나은행 지점은 대형 빌딩의 1층과 4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층은 일반 은행이었고, 4층은 VIP 전용 창구 및 대여 금고를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4층 VIP 창구로 안내받아 퇴직연금을 하나은행으로 옮기고 개인 대여 금고를 받을 수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개인 대여 금고를 부여받고, 열쇠를 받은 다음, 사용 방법을 숙지한 후 금고에 어떤 걸 넣을지를 상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금고에 넣을 것은 없었다. 요즘 시대에 집에 현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귀금속을 좋아해서 안전하게 보관할 필요성이 있는 물건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막상 은행 금고를 받는 것만 신경 썼지, 무엇을 넣을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금고에 현금이나 귀중품, 부동산 증서, 명품 시계 등 다양한 물품을 넣는다던데 나는 넣을 귀중품이 없었다.
나는 자녀의 백일 미니 앨범과 가족사진 몇 장을 들고 은행으로 향했다. 결국 중요한 건 가족이니까..
처음 개인 금고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컴퓨터가 한 대 있고, 금고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옆에 있는 금고문이 열린다.
금고는 이렇게 생겼다. 이렇게 많은 금고 중에 내 금고에 빨간 불이 들어오니 빨간 불 들어온 금고로 가서 열쇠로 문을 열면 된다.
열쇠 옆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 보일 것이다.
금고를 열면 이렇게 안에 통이 하나 더 있는데, 이 통 안에 귀중품을 보관하면 된다.
이렇게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하고 뿌듯한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개인 금고를 다시 방문한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