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15)
텃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리 좋은 흙은 아니다. 밭이 아니었던 곳에 밭을 만들 때, 흙을 더 깊이 파내고 좋은 흙을 채워 넣었어야 했다.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설마 싶기도 했고, 어차피 취미 삼아 하는 일인데 그 정도면 되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한 밭이다.
그렇다고 소출이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늦깎이 얼치기 농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여름부터 늦가을에 걸쳐 소소한 수확의 기쁨을 주기에는 충분히 어진 땅이다. 게으른 주인을 만난 것치고는 해마다 싹을 틔우고 결실을 내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사람도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이 땅은 불평 없이 제 몫을 한다. 한편으로는 이 땅에게, 거기 심어질 씨앗들에게 살짝 미안하기도 하다. 더 좋은 흙을 만들어줬더라면 더 잘 자랐을 텐데. 어차피 사람 입으로 들어갈 운명이기는 하지만. 흙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제오늘 이틀간 봄비가 왔다. 소리도 없이 내리다 그치고, 그치다 또 내리는 봄비였다. 아침에 내려선 텃밭, 흙이 검어 보인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색이다. 침침한 눈에도 군데군데 흙이 볼록 솟아 있고, 세 갈래로 금이 가 있다. 멈춰 섰다. 아이고, 올해도 감자가 달리겠구나. 내가 제대로 심긴 심었군. 별것도 아닌 일인데 괜히 안도가 된다. 감자를 심은 게 엊그제 같은데, 땅속에서는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냉큼 휴대폰을 꺼내 쪼그려 앉아 요리조리 사진을 찍었다. 이 볼록한 흙, 이 세 갈래 금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오리걸음 자세로 한참을 들여다보다 일어서려니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고, 핑 하고 어지럼증도 왔다. 감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사람이 먼저 비틀거린다. 이 나이에 텃밭이 덤으로 주는 것들이다.
감자 싹이 땅속에서 흙을 밀며 나오려는 순간. 이제는 낯설지 않은 모습인데도 볼 때마다 묘하게 경건해진다. 아마 내일쯤이면, 갓 태어난 아이의 살결처럼 흙 묻은 작은 초록 잎이 머리를 내밀 것이다. 그 작은 것이 흙을 밀어올리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매년 가장 설레고 기다리는 순간이다. 해마다 똑같은 장면인데, 해마다 처음 보는 것 같다.
늘 다니는 길 옆에 늘 눈여겨보는, 말하자면 벤치마킹하는 남의 밭이 있다. 그 밭은 늘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흙 색깔은 비옥 그 자체. 가을과 이른 봄에는 왕겨 같은 것으로 덮여 있기도 하다. 토마토나 오이를 받쳐주는 지지대는 자로 잰 듯 기하학 도형처럼 질서정연하게 설치되어 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깔끔한 밭이구나 싶었는데, 볼수록 범상치 않다. 흙 관리부터 지지대 설치까지, 보이지 않는 공을 얼마나 들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도 그 밭 옆으로 지나왔다. 봄비를 맞은 그 밭도 역시 달랐다. 완전히 전문가의 밭이다. 볼 때마다 우리 밭도 흙을 갈아줘야 하는데, 싶으면서도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고, 이미 심어놓은 것들이 있으니 타이밍도 쉽지 않다. 벌써 몇 해가 지났다. 아마 올해도 이대로일 것 같다.
그래도 감자는 또 나올 것이다. 이 어진 땅이 또 그렇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그 밭을 지날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