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밭으로 전향한 봄비 아나키스트

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16)

by 완서담필

감자싹이 잠수함 해치를 열고 나오듯 여릿여릿한 연초록 몸체를 드러냈다. 벌써 삐죽하게 튀어나온 녀석도 보인다. 하늘을 향해 한껏 받쳐 든 솜털 가득한 잎에는 흙알들이 고스란히 얹혀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대견하고 신기하고 경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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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쯤이면 이 녀석들도 어린 티를 벗고 검초록 잎을 사춘기 아이들처럼 과시하기 시작하겠지. 아직은 그럴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어제도 하루 종일 봄비가 오락가락하며 흙을 적셔주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조리개로 화단에 물 뿌리듯 내리다 멈추다 또 내리는, 그런 비였다. 오늘 아침에는 구름 뒤로 햇빛이 나와 겨울을 버텨낸 것들에게 기운을 불어넣는다. 담쟁이처럼 자라는 아케비도—한국에서는 으름덩굴이라 부른다던가—고즈넉하게 꽃을 피웠다. 그 꽃이며 잎이며 줄기에 빗방울들이 영롱하게 모여 앉아 있다. 클로젯 속에 모셔두었던 카메라를 오랜만에 꺼내 들고, 오리걸음으로 한참을 쭈그린 채 그 곁을 서성이며 셔터를 눌렀다. 비 온 뒤의 이른 아침, 이 시간 이 풍경이 좋다.



그러고 보면,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우주회라는 비밀결사 멤버이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수업을 빼먹고 술을 마시는, 아주 불순하고 위험한 단체. 그 시절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나키스트가 되곤 했다. 신촌블루스나 김현식의 노래를 좋아하는.


오늘은 「비의 블루스」나 꺼내 들어야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금 땅을 밀고 나온 저 감자들 덕분에 생각난 김에, 슈퍼에서 사온 몇 알 남지 않은 감자로 감자전이나 부쳐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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