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음소평 (2025년 7월 2일)
최악(最惡) 대신 차악(次惡)을 고르는 정치에서 벗어나는 법? 하나 있긴 하다. 선호투표라는 방법.
솔직히 말해 보자. 지금 한국 정치는 십수 년을 넘도록 기능부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는 팬덤 정치로 흐르고, 정치인들의 직업적 이해관계는 정치의 흐름을 더욱 혼탁하게 만든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보다는, 직책과 권한을 지키고, 당리당략과 특정 이익을 우선하는 행태가, 진영을 불문하고 노골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대통령을, 혹은 당대표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표정과 단일대오라는 구호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민주정치의 전부인 양 여겨지는 현실. 다행히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정권교체가 단지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의례처럼 굳어진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교체인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선진국 문턱을 넘었다는 선언, 유권자의 정치 감각이 프로 정치인 못지않다는 자화자찬. 그 모든 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한 정치의 민낯은 참담하고, 남는 것은 자괴감뿐이다.
선거제도는 여전히 거대 양당의 독점 구조를 견고히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상식 보수와 성찰적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 제3지대라 불리는 목소리들, 양당의 틀 바깥에서 출마한 독립 후보들. 이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동안 우리가 수차례 목격해 온 것처럼, 양당 이외 정당의 후보들은 대개는 특정 정당의 후보를 견제하거나, 노골적으로는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역할을 수행하는 들러리로 기능하게 된다.
선거판에 나선 후보자들은 목숨을 걸다시피 경쟁에 나서지만, 그 경쟁은 결국 상호 비방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지방 선거든 마찬가지다. 선거 기간 동안의 공식 토론도 그렇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이뤄지는 이른바 정치평론이나 시사토론이라는 것도, 결국 각 진영의 주장을 재미라는 요소와 결합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데 그친다. 대안적 시선은 부재하고, 정반합적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양당이 독점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은, 정치의 이름을 한 예능화된 쇼, 토론이라는 미명하의 대리전에 불과하다. 필자 역시도 모르는 사이, 그 대결의 풍경 속 어딘가—혹은 댓글창의 어귀쯤에—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조자인지, 구경꾼인지, 방관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장면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괜찮지 않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가. 없는 건 아니다. 하나의 예로, 선호투표제도라는 방식이 있다. 유권자가 단 한 명의 후보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순서대로 복수의 후보자에게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Ranked Choice Vote(RCV)라고 불린다.
이 제도에서는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예를 들어 1순위 B정당 후보, 2순위 C정당 후보, 3순위 무소속 후보, 4순위 A정당 후보와 같이 기입할 수 있다. 투표 마감 후, 먼저 모든 후보자의 1순위 득표를 집계하고, 과반수 이상을 얻은 후보가 있다면 당선된다. 그러나 과반을 얻지 못할 경우, 최하위 후보는 탈락하고, 그 후보를 1순위로 찍은 표는 각자 두 번째로 선택한 후보에게 넘어가 다시 계산된다. 이 과정은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반복된다. 그 결과 당선된 후보는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은 후보로 평가된다.
이러한 투표 방식은, 특히 치킨 게임처럼 끝없는 대립을 반복하는 양당 독점의 적대적 공생 구조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유권자에게 복수의 선택지를 부여함으로써, 양당 체제 바깥에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들이 보다 용이하게 정치의 장에 진입하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제도에 반영할 기회를 갖게 된다. 적어도 단순다수제보다는 훨씬 더 넓은 기회의 창이 열리는 셈이다
또한 유권자의 입장에서도, 가령 특정 정당이나 진영에 속하지 않은 제3지대 후보에게 1순위를 부여하더라도, 그 표가 사표로 버려지지 않는다. 2순위, 3순위 선택이 순차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최종 과반 득표를 결정하는 과정에 여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투표 방식은 양당 독점 상황에서 반복되는 정치의 도덕적 타락을 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타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부패’의 개념을 따른다. 그는 통치자가 누구이든—1인이든, 소수이든, 다수이든—그 정치가 공공의 이익이 아닌 통치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작동할 때, 그것은 썩은 정치, 나쁜 정치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선호투표제도는 이러한 타락의 구조를 제도적으로 우회하고, 부분적으로나마 교정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 복수의 후보자에게 순위를 매겨 투표할 수 있기에, 유권자는 더 이상 '빌런과 빌런의 경쟁' 속에서 덜 나쁜 쪽을 억지로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당리당략이나 일신의 영달을 좇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부패한 정치세력을, 마지못해 선택해야 했던 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후보자들 역시 2순위로나마 선택받기 위해서는 상호 비방이나 혐오를 자극하는 언행을 자제해야 하고, 강경 지지층에게만 어필하는 싸움닭 같은 전략이 아닌, 보다 상식적이고 품위 있는 태도로 유권자 앞에 서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에 대한 혐오를 완화하고, ‘우리 편 지키기’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타락의 관행 역시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다.
물론, 선호투표제도 하나만으로 정치의 기능부전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가 드러내는 병리적 증상들은 단지 투표 방식에만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제도는, 개표에 시간이 걸리고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극단적 양극화라는 오늘의 정치 현실 앞에서, 이 제도 역시 또 다른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비례대표제를 위성정당이 오용했던 것처럼, 제도의 취지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기술적 수단과 유권자의 집단적 의지를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복잡한 절차나 시간 문제는 전자 시스템의 도입과 운영을 통해 개선할 수 있으며, 제도에 대한 이해 역시 사전 홍보와 시민 교육을 통해 널리 확산시킬 수 있다.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어가 있지 않은가. 한국 유권자의 수준은 세계 최고라는 말. 그 말이 단지 유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이제 그 집단적 역량을 제도 변화의 실질적 동력으로 되살려야 할 때다.
다만, 이런 말 한 줄에 다 담을 수 없는 질문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그 ‘역량’을 스스로 증명해 왔는가. 만약 ‘빌런’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 빌런을 길러온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유권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제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하다.
각설하자면, 선호투표제도는 공허한 이상이 아니다. 이미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도입되어 시행 중이다. 미국 메인주는 지방선거는 물론 연방 하원 선거에도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 산타페, 미니애폴리스, 세인트폴, 케임브리지 등 주요 도시들에서도 운영되고 있다. 호주 역시 하원의원 선거를 비롯한 다양한 선거에서 이 제도를 오랜 시간 시행해 왔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확산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지역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의지다. 특히 한국의 경우, 거대 양당이 독점의 이익을 내려놓고 선호투표제를 받아들이려 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선거제도 개혁이란 본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일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도, 그 불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유권자의 절반이 또 다른 절반을 향해 서로 분노하는, 그런 일상에 익숙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유권자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주저하는 쥐가 아니다. 스스로 방울을 달지 않으려는 고양이라면, 그 고양이가 결국 방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그것이 쥐가 아닌, 주권자로서의 시민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그 시민은 누구인가.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숙의를 통해 공론화를 이끄는 사람—그 시민은 바로 우리다. 우리여야 한다.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니, 우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25년 7월 2일
소나리우스의 세음소평(世音小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