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텃밭 이야기 (11)
고3 때 진학지도 선생님이 농학부 쪽으로 가면 모 대학 합격권이라고 귀띔해 주신 적이 있다. 가고 싶었던 곳이 꼭 그 대학은 아니었으므로, 점수에 맞춰 전공을 바꿀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40여 년을 살아오며, 특히 후반의 20년은 농업과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일로 먹고 살아온 셈이다. 그리고 그 후반의 또 후반 10년은, 텃밭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런 텃밭이지만, 얼떨결에 마련한 마당 구석에서 직접 채소를 길러 보기로 작정하고, 나름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다. 문득 생각한다. 차라리 그때 농학을 전공으로 택했더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때 진학지도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걸까, 아니면 사주관상가 같은 감이 있으셨던 걸까.
김장철이 다가오면 유독 무가 들어간 음식이 많았다. 맑은 된장에 무채를 썰어 끓인 무국, 약간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무 동태찌개, 그리고 깊은 바다의 냄새가 올라오는 무 해물탕까지. 그 모든 맛에는 계절의 기억이 배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생무를 유난히 좋아했다. 어머니가 깍두기를 담그실 때면 도마 옆에서 냉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곤 했다.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겨울밤에는 통무를 썰어 서걱서걱 씹어 먹기도 했다. 감기 기운이 오를 무렵엔 그것이 미열을 식혀 주는 약이기도 했으리라. 두툼하고 짧달막한 조선무의 시원하고 매콤한 단맛, 그 맛이 내 어린 날의 겨울 맛이기도 했다.
요 며칠 잦은 비가 내려 물을 줄 필요도 없었던 텃밭. 거의 방치에 가깝게 자라난 무 몇 뿌리가 흙 속에서 하얀 속살을 살짝 드러냈다. 조선무가 아닌, 열도의 다이콘이다. 아마도 토양이 달라서일까. 조선무와는 달리 길고 홀쭉한 몸을 한 무가, 낯설면서도 이제는 제법 정겹다. 잎 밑둥의 푸른빛이 감도는 부분을 한입 베어 물면, 어린 날 입안 가득 번지던 그 조선무의 향이 잠시 되살아난다. 멀어진 시간과 바다 건너 흙 냄새가, 맛이라는 감각을 매개로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맛이라는 것도 결국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