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의 탄원서

by 김성훈

20여 년 전, 울산의 차가운 겨울 아침이었다.

화학공장 건설현장은 새벽부터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날은 공사의 중요한 날이었다. 영국과의 합작으로 진행되던 화학공장 건설 공사에서, 450톤 크레인을 동원해 주요 장비를 설치하기로 한 날이었으니, 현장은 말 그대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의 기계 담당 팀장인 조 차장이 아침이 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설치 작업은 그가 책임자였기에 그의 부재는 곧 혼란을 의미했다. 모두가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해 당황스러워하던 중, 정오가 되어서야 그는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초췌하고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묻자 그는 멈칫거리더니, 결국 밤새 경찰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조 차장은 전날 늦은 밤, 음주운전을 하다 중앙선에서 불법 유턴을 하며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 술에 취한 그는 사고의 책임을 피하려 도망쳤고, 택시 기사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넘겨졌다. 심야에 조사를 받던 그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또다시 도주를 시도하다 결국 붙잡혔다. 경찰은 그의 행위를 도주죄로 간주했고, 죄질이 나쁘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조 차장은 공사의 핵심 팀장이었고, 그의 구속은 곧 공사 중단을 의미했다. 수백 명의 작업자가 일터를 잃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 간의 신뢰가 걸린 문제였다.


그의 아내와 가족들은 변호사를 급히 선임했다. 나 역시 울산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모든 법조 전문가와 선임한 변호사도 한결같이 말했다.

음주운전, 중앙선 불법유턴 충돌사고, 도주라는 삼중의 잘못으로 구속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밤이 깊어갔고, 우리는 점점 더 걱정과 함께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한 지인의 소개로 밤늦게 만난 검찰청 간부 직원이 조언을 주었다. “탄원서를 제출해 보세요. 조 차장의 인품과 현장에서의 역할을 충분히 설명하고, 그의 구속이 가져올 영향을 진심을 담아 호소하면 판사가 심사숙고할 겁니다.”

그는 최근 있었던 다른 사례를 예로 들었다. 한 대학생이 여중생과의 관계로 구속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를 평생 책임지겠다”는 진심 어린 탄원서 덕에 불구속 판결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날 밤 숙소 책상 앞에 앉았다.

조 차장의 잘못은 백 번 처벌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이번 공사는 영국과 우리나라의 공동 투자가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의 구속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공사를 중단시키고, 800여 명의 지역 근로자가 일터를 잃는 문제로 확장될 수 있었다. 나는 밤새워 한 문장 한 문장 간절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써 내려갔다.


“조 차장은 그동안 성실하게 회사를 위해 헌신해 온 인물입니다.

이번 사고는 본인이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회사와 직원 모두가 그와 함께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구속은 단순히 개인의 처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사 중단과 근로자들의 생계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튿날 아침, 가족들과 동료와 근로자 800명이 서명한 간절한 마음을 담은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우리는 판사의 결정을 기다리며 긴 하루를 보냈다. 밤늦게, 판사는 고심 끝에 불구속 결정을 내렸다.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판사의 한마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조 차장은 이후 벌금형과 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히 현장에 복귀해 책임을 다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반성과 다짐이 엿보였다. 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사람의 잘못은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법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탄원서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때로는 내가 썼던 문장을 되새기며 스스로 감탄도 하고, 그때의 간절했던 마음을 떠올린다. 지금은 조 차장이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그의 실수는 분명히 컸지만, 그의 진심과 우리의 간절함은 차가운 법의 잣대를 잠시 녹였다.


겨울이 오면 그날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탄원서를 쓰던 밤, 우리의 반성과 다짐, 그리고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구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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