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해야 가족들도 행복해진다.

by 김성훈


손녀가 다섯 살 무렵 집에 놀러 온 날이었다. 내가 손녀에게 “할아버지 방에 가서 물컵 좀 가져올래?” 하고 부탁하자, 이내 방을 다녀온 손녀는 “할아버지 방엔 컵이 없어요” 하고 말했다. 함께 손을 잡고 큰방으로 가자 손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긴 할머니 방이에요. 할아버지 방은 저기 작은방이에요.”

나는 손녀에게 “지안아, 우리 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할아버지고, 그래서 큰방이 할아버지 방이란다”라고 말했더니, 손녀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아니야, 할머니가 더 높아. 큰방은 할머니 방이야.”

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그럼 지안이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하고 묻자, 손녀는 “엄마가 1번, 아빠가 2번, 할머니가 3번”이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4번은 누구야?”라고 물으니 “외할머니!”

마지막 기대를 담아 “그럼 5번은?” 했더니, 한참을 생각하더니 “음... 할아버지!”

순간 큰소리로 웃었다. 손녀의 세계에서 할아버지는 5번째였다. 손녀의 순위는 ‘가장 가까이서 보살펴주는 사람’ 순이었다. 나처럼 해외 근무로 자주 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자연스레 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나도 돌아보니, 두 아들이 어릴 때에도 지방과 해외 현장 근무 탓에 자주 집을 비웠다. 지방에 있을 때는 2주에 하루, 해외에 있을 땐 두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은 내가 출근할 때 “안녕히 가세요”라고 손님 인사를 하듯 했다. “왜 다녀오세요가 아니라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니?” 물으니, “2주 뒤에 오는 아빠는 다녀오는 게 아니니까요.” 아이의 말에 가슴이 찡했다.

80년대 산업화 시대를 산 베이비부머 가장으로서 나는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했고,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은 아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아들들은 성장해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도 했으며, 나처럼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입학식, 졸업식에 함께한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시간이 늘 마음속에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손녀의 솔직한 말 한마디에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이제 세상은 변했고, ‘가족이 우선인 시대’가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가정은 우리 부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집안일은 함께하고 육아도 함께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가족 문화를 본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가장'으로서의 위치도, 자세도 혼란스러웠다.


2020년 구정을 맞아 한국에 왔다가 코로나에 발이 묶여 사업을 접고 집에 머물게 되면서 아내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실을 점령한 나, 늘 바깥에 있던 남편이 집안 구석구석 간섭을 하니, 아내도 스트레스가 컸을 것이다. 처음엔 가장의 권위로 대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내가 바뀌어야 집이 편해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내 자리를 조용히 인정하고, 기분 좋게 양보하며 살기로 했다. 우리도 어느새 자식에게 의지하는 부모 세대가 되었고, 세대의 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먼저 웃기로 결심했다. 기분 좋을 때는 한 번, 힘들 때는 두 번, 세 번씩 더 크게 웃는다. 웃음은 힘이고, 웃음은 행복을 불러온다. 불평 대신 감사, 불안 대신 여유를 마음에 담고 살기로 했다. 이제 가장의 역할은 지시가 아니라, 격려이고 지배가 아니라, 포용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나 바빴던 세대였다. 나라를 일으킨다는 사명감 아래, 가족에게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부터 변하면 가족이 변하고, 웃는 얼굴 하나로 집안 분위기가 따뜻해진다.

이제는 진정으로 가장다운 자리를 찾고 싶다. 가족과 함께 웃고, 함께 기억을 만들며, 인생의 황혼을 환하게 밝혀주는 그런 가장 말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며,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나는 오늘도 웃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지금 내가 행복해야 내 가족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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