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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Jul 24. 2020

우리가 멀어진 이유는

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야   

그와 나는 대학 동기로 만났다. 

나는 스무 살,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을 다니다 온 5살 많은 오빠. 

당시엔 재수생, 삼수생이 꽤 있었고, 그가 동기들 중 최고령자였다. 

그러나 어디서도 언제라도 '나이'를 티 내지 않았다. 

동기 모두 허물없이 대했고 스스로도 나잇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호칭은 '형'에서 '옹'으로 대체로는 '오빠'였다가 화가 나면 '야'가 되는, 그런 사이였다.  


늘 에너지가 바닥인 나와 달리 그는 언제나 하이 텐션이었고, 그 점이 늘 부담스러웠다. 

180이 넘는 키로 성큼성큼 다가와 앞에 서는 것도 부담이었고,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자주 피해다녔는데...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어쩌다 보니 졸업한 뒤에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이가 됐고, 사람들은 우리를 '절친'이라 생각했다. 


동기들 중 비슷하게 어중간한 이들이 나와 절친이 됐고, 철마다 같이 어디론가 가난한 여행을 떠났다. 

사회인이 됐지만 운전하는 이가 없어 기차와 버스와 두 다리로 곳곳을 다녔던 20대와 30대 초반. 

한 방에 삐대며 자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고, 그 어떤 스킨십도 들뜰 게 없었다. 

할 말과 못할 말이 없었고, 모르는 속사정도 없었다. 

절친만이 가능한, 대놓고 욕하는 일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점점 점점 가까워졌다.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20대 말부터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했고 가정을 꾸렸다. 

그와 내가 남았고, 서른이 시작되던 해 겨울에 나는 심한 우울을 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가득한 날들이었다. 

언젠가 가 본 적이 있는 동백꽃이 피는 절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늘 그렇듯 흔쾌히 그가 동행해주었다. 

그 무렵, 그는 조금씩 오빠 노릇을 해주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막상 먼길을 달려 도착한 절에는 동백꽃은 피지도 않았고, 둘만 걷는 길은 심심했다. 

해가 저물고 숙소를 잡으면서는 내가 잠시 고민하며 방 두 개를 잡을까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왜, 뭣하러?' 이런 반응이었고, 그래서 늘 그런 것처럼 같은 방으로 체크인했다. 


커플을 위한 방이었을까. 조명이 속 터지게 어두웠다. 

야릇한 커튼은 겹겹이었고, 침대 시트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심한 난방 때문에 (때문이었겠지?) 겨울인데도 더웠다. 조금, 아주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어땠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나는 그랬다.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려 티격태격 툴툴대며 각자 차례로 씻고 나와 한 침대에 등을 지고 누웠다. 


긴....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정말 우리는 '절친'임을 인증한 듯 숙소를 나섰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심심한 여행을 마쳤다. 

이후 서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오래 다른 친구들에게 그날의 일을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서로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그가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30대 중후반에 미친 듯 연애를 하더니 결혼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지인 1위로 꼽히던 그가 결혼을 했고, 

나는 절친 무리 중 혼자 싱글로 남았다. 

당연히 결혼식에 갔었고, 그 무렵 나도 한 사내와 막 연애를 시작해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그가 결혼한 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할 말 못 할 말이 없었고, 자주 서로에게 예의라는 걸 잊었다. 

더러 누군가는 예를 들면 그의 와이프 같은 이가 오해할 수 있는, 불쾌해할 수 있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한결같은 관계란 건 없다. 

관계도 살아 있는 것이라 생몰이 있는 것이고 성장과 퇴락이 있고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뒤늦게 우리 사이에 무너진 경계를 회복하려 했고, 가까워진 거리를 띄어보려 했다. 

아마 그게 시초였을 것이다. 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하지만 전하는 방식이 달랐어야 했는데... 

나는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모든 잘못을 그에게 있는 듯 쏘아붙이며 정색했다. 

불쾌하며 불편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아무 때나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당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왔다가 내가 던진 칼에 맞아 돌아갔다. 


그렇게 내 뜻대로 그와 나 사이에 벽이 섰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은 사라졌다. 

내가 아무 때나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쳤으니까. 

그러니까 그의 전화나 문자 메시지가 온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반년 가까이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건 다행한 일이라 해야 할까. 


오늘 서류 봉투를 뒤지다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이 글을 쓴다. 

그 사진은 언제쯤인지 알 길 없는, 어느 백사장에 삼각대를 뻗쳐놓고 쭈그리고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아무 때나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친 내가, 아무 때인 지금 그에게 안부를 물어도 되는 걸까? 



가까워도 예의는 지켜야 하고, 오래되어도 노력해야 한다. 

저절로 단단해지는 건 세상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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