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면 일단 힘부터 좀 빼고
나이가 들어서 피아노를 제대로 '다시' 배워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순전히 음악과목 성적이 잘 안 나온다는 이유로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으로 떠밀었다.
그 당시엔 주산, 피아노, 태권도, 미술 학원이 모범생들의 필수 코스였다.
나는 주산학원만 다녔는데, 엄마는 뭔가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걸까.
형제가 많아 사교육비를 넉넉하게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는데 오죽 성적이 나빴으면...
어쨌든 그렇게 피아노 학원엘 다니기 시작했고, 바이엘 하권까지 배웠을 때였나 나는 뛰쳐나오고 말았다.
영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판알 튕기는 건 자신 있었는데 아무리 복잡한 사칙연산도 재미있었는데 이상하게 음표는 못 보겠더라.
그 기호를 건반으로 옮겨와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일이 왜 그리 복잡하고 연결되지가 않던지...
그 뒤로 피아노 학원은 그만뒀고, 음악 과목 성적은 그럭저럭 오르락내리락하며 모자라지 않게 유지했다.
피아노와의 첫 대면은 그렇게 끝이 났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시 피아노를 대면한 건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기쿠지로의 여름' '인생의 회전목마'를 꼭 내 손으로 연주해보고 싶었기에.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기웃거려보다가 개인레슨을 신청했다.
컴퓨터 자판을 십수 년 간 두드리던 사람이라 손가락이 굳지는 않았는지
선생님은 폭풍칭찬을 매수업시간마다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리듬감도 좋고, 표현력도 좋고...연습량만 좀 더 있다면. 하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때는 마치 당장에라도 뭐가 될 것 같았다. 재능을 뒤늦게 발견해 통탄을 금하지 못했다 할까.
하지만 먹고살자니 결국 연습량에서 발목이 잡혔고 (과연 정말 그 이유뿐일까마는 그렇게 믿고 싶다) 체르니 100에서 또 한 번 피아노를 그만둬야 했다. 그러나 언제든 또다시 시작할 마음은 남겨두었다.
발레의 세계에 문을 두드린 적도 있다.
순전히 취재를 위해서였다. 주인공이 발레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는 거다.
그러니 경험해 보는 수밖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발레 교습소를 찾아가 등록했다.
15명쯤 되는 수강자 중 20대와 30대 초반의 여자가 절반을 넘었고,
초급반인데 초보자가 없는 반, 이기도 했다.
취재를 위해서니까 딱 한 달만 해보자 시작한 일이라 장비(?)투자도 최소화했다. 발목 보호를 위해 연습용 슈즈는 필수라 해서 그것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긴 티셔츠에 레깅스로 연습복을 대체했다. 첫 수업시간.
보이는 전부를 빨아들일 것 같은 대형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선 순간,
그동안 내가 내 몸을 얼마나 착각하며 살았는지 느껴졌다. 뚱뚱하다 날씬하다를 넘어서는 자각이었다.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아니 여기에도 근육이 있었나, 이것도 내 몸이었나 싶게 평생 쉰 것 같은 근육들이 깨어났다. 아래위와 좌우를 길게 쭉쭉 늘이다 보면 90분이 후딱 갔다.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는 그 90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취재는 이미 잊었고, 그렇게 반년을 보냈다. 초급반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지만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스트레칭은 할 만했지만 발레의 기본 동작을 익히고 그를 연결해나가는 일은 어려웠고, 결정적으로 턴 동작을 소화할 수 없었다. 어지럼증이 심각했고, 매번 나 때문에 수업 진도가 느려지는 게 너무도 미안했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뒀지만 사실 발레에 재미를 붙여갈 때의 목표는 '무대'였다. 아마추어 발레단의 공연 무대에 서는 것. 10년 가까이해야 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지금은 꿈으로만 남겨뒀다. 쉰이 넘은 발레리나는 사실 쫌...상상이 가지 않기도 하고. 사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몇 년뒤 독주회를 열겠다며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언제나 시작은 원대하고, 그 끝은 미미했다. 나란 사람은.
드로잉의 세계도 기웃거렸다.
그때도 목표는 개인전을 여는 거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1%의 진심조차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 오평 방바닥에 지금껏 그린 작품(?)들을 쭉 펼쳐놓고 개인전을 열기도 하니까.
개인전이라는 것이 관람객조차 개인이라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언제고 드로잉도 수채화도 펜화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즐겁게.
내가 그간 떠돌았던 취미의 세계는 즐거웠다. 포기가 쉬워서 내일 당장 그만둘 수 있었고,
그러다가도 글피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뭐가 되겠다고 작정하지 않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글쓰기는 달랐다. 포기도 안 되고,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도 어려웠다. 괴롭기도 했다.
빨리 뭐가 안 되니까, 시간은 가고 더 이상 버틸 재간은 없으니까 괴로울 밖에.
간혹 긴 무명 끝에 주목받기 시작한 연기자들이 인터뷰에서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서로 이렇게 말하기로 합시다, 짜기라도 한 듯.
"마지막이었어요. 이번만 딱 해 보고 안 되면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이민을 준비하고 있던 중에 만난 작품이에요. 이제 그만하자고 마음먹었는데..."
"먹고살아야 하니까 더는 못 버티겠어서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막다른 골목 그 끝에서 소위 인생캐를 만나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한때는, 성공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삐딱하게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겠다.
그들이 말한 마지막의 의미를. 백 도씨. 끓는점.
모든 걸 다해봤다고 생각했으니 마지막 점을 찍을 생각이었겠지.
끝까지 가야 다음이 있는 거니까, 끝에서 새 길이 열린 거겠지.
나도 맨날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만둬 버릴 거야. 다른 일 할 거야. 새길을 찾겠어.' 라고 수도 없이 말하지만
진심에는 아직, 마지막 점을 찍을 생각이 없는 거다. 끝까지 가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마음을 좀 내려놓고 힘 좀 빼고 그냥, 쭉...쓰자.
이 한 마디 하려고, 스스로에게 이 다짐 하나 받아내려고 썰이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