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 한 것 같은 기분
닳아서 짧아진 연필을 보다가 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버리자니 아직은 쓸만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쓰자니 새 연필이 있는데 굳이.
많은 창작 노동자들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어쩌면 대부분의 직업인들은
남의 평가를 받아야 되고, 점수가 매겨져야 하고, 끊임없이 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요, 이런 것도 할 수 있구요, 저런 것도 할 수 있구요,
쟤보다 더 잘 할 수 있구요, 더 열심히 할 수 있구요....
용케도 그걸 잘 증명해 보이며,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게 보이도록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요, 이제 못하겠어요.
충전만 하면 거뜬히 또 얼마간을 잘 버티던 시절은 지나갔다.
'소진: 점점 줄어들어 다 없어짐'
그 끝에 와 있는 기분.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시작한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오늘 만난 '새 연필'은 손에 쥐고 싶어지는, 탐나는 물건이었다.
사람 눈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나만 그렇게 본 건 아닐 테다.
닳아서 손에 쥐기도 힘든 저 몽당연필은
그간 쓴 정이 있어 버리긴 어려우니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린 듯 사라져 주면 어떨까.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애써 혼자 땅굴을 파고 있는 상태이긴 하다.
하지만, 이만큼 지내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기는 법이니까,
이유 없는 나 혼자만의 땅굴 파기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