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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Nov 13. 2024

소진

쓸모를 다 한 것 같은 기분 

닳아서 짧아진 연필을 보다가 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버리자니 아직은 쓸만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쓰자니 새 연필이 있는데 굳이.


많은 창작 노동자들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어쩌면 대부분의 직업인들은 

남의 평가를 받아야 되고, 점수가 매겨져야 하고, 끊임없이 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요, 이런 것도 할 수 있구요, 저런 것도 할 수 있구요, 

쟤보다 더 잘 할 수 있구요, 더 열심히 할 수 있구요....


용케도 그걸 잘 증명해 보이며,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게 보이도록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요, 이제 못하겠어요.


충전만 하면 거뜬히 또 얼마간을 잘 버티던 시절은 지나갔다. 

'소진: 점점 줄어들어 다 없어짐' 

그 끝에 와 있는 기분.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시작한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오늘 만난 '새 연필'은 손에 쥐고 싶어지는, 탐나는 물건이었다. 

사람 눈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나만 그렇게 본 건 아닐 테다. 

닳아서 손에 쥐기도 힘든 저 몽당연필은 

그간 쓴 정이 있어 버리긴 어려우니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린 듯 사라져 주면 어떨까.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애써 혼자 땅굴을 파고 있는 상태이긴 하다. 

하지만, 이만큼 지내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기는 법이니까, 

이유 없는 나 혼자만의 땅굴 파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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