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모나코 & 생폴 2014
원래 오늘은 니스를 한 번 더 돌아볼 예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니스에서 하루를 더 보내야 하는데, 딱히 알아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쉬면서 도시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이런 내 일정을 들은 민박집 사장님은 질색하시더니, "어떻게 이런 귀중한 시간을 그렇게 쓸 수 있냐"라시며 니스 근처에 갈만한 근교 관광지를 소개해주셨다. 바로 모나코와 생폴이다. 두 도시 모두 니스에서 왕복 1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하루에 두 군데를 다녀와도 시간이 꽤 여유가 남을 것이라 예상됐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모나코와 생폴 여행이 시작됐다.
모나코라는 곳은 정말 여행지로 아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곳이었다. 이름 자체는 익숙했지만 뭐가 유명한지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모나코를 가기로 결심한 그 순간에도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모나코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시간은 아침 11시.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자 모나코가 등장했다. 모나코에 대한 첫인상은 '라스베이거스가 바다 옆에 있었다면 바로 이 모습이지 않았을까'였다. 건물부터 여태 봐왔던 유럽의 도시들과는 다르게 부티 났고, 어딘지 모르게 호텔과 카지노처럼 생긴 건물들이 산 중턱 곳곳에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첩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휴양을 가기 위해 택하는 그런 도시의 모습이 입이 떡 벌어졌다.
그냥 무작정 걸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 근처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이정표로 삼아 눈에 담았고, 큰길을 따라 도시를 거닐었다. 도시 자체가 해안을 바라보는 산 중턱에 계단식으로 빌딩들을 쌓아 올린 구조였다. 거대한 빌딩들 사이사이에 조화롭게 심어진 나무들의 싱그러움이 이 도시가 주는 상쾌함을 배가 되게 했다. 어쩌다 시야에 하늘, 바다, 빌딩, 나무들이 동시에 담길 때는 이것이 바로 조화로움의 결정체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산 중턱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도시의 사람들과 차들이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즐거웠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에게 목적지가 됐다. 산 위에서 산 아래까지 내려가는 여정을 통해 모나코의 고저차를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걸으면서 느낀 건, 이 도시는 내 첫인상처럼 부티나는 도시임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항구 곳곳에는 비싸 보이는 요트들이 즐비해 있었고, 차량 매장에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고가의 멋진 차량들이 길거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임스 본드가 와서 차를 한 번에 구매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아마 일정에 여유가 더 있고, 내 힘으로 번 돈이 수중에 있었다면, 옆에 있는 카지노에 가서 이 상쾌한 도시를 일주일 정도 즐기지 않았을까? 영화 같은 휴가를 보내기에 최적인 장소, 그곳이 바로 모나코였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나와서였을까, 도시를 하루 종일 걸어서였을까.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은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고, 저녁을 먹기에도 너무 일렀다. 그리고 지중해 요리는 먹어봤으니 이제 다른 종류의 요리도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러다 눈에 띈 곳이 디저트 가게였다.
딱히 디저트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럽 여행을 다니며 먹어온 디저트들 덕분에 그 맛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특히나 창가에서 한 할아버지고 드시고 계시던 사과 타르트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식당에 들어가 사과 타르트 하나와 마카롱 두 개를 시켰다.
아마 이때 먹은 사과 타르트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디저트가 시작된 본고장이 유럽이고, 그곳에서 먹는 '원조' 디저트라서 그런 걸까? 한국에 와서 수많은 타르트를 먹어봤지만 이렇게 달콤하면서도 깔끔한 맛을 구사하는 건 먹어본 기억이 없다.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파티셰의 음식은 단지 달콤한 것을 뛰어넘어 매혹적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타르트 하나에 투자한 뒤, 소화도 시킬 겸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질적이면서도 매우 반가운 광경이 나를 맞이했다. 당시에 모나코에서 국제 문화 행사 관련된 콘퍼런스가 진행되고 있었나 보다. 잘 만들어진 일본식 정원이 바닷가 옆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한국은 아니었지만, 한국과 그래도 비슷한 정취를 풍기는 일본의 전통 정원을 마주치니 괜스레 반가웠다. 국가는 다르지만 같은 문화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싶었다.
언젠가는 한국식 건축 양식이 이런 이국적인 곳 한가운데 지어지길 기도하며 정원과 이별을 고했다. 생각해보면 색다른 경험이었다. 바다 바로 옆에 이런 정원이 지어진 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겪어본 적이 없다. 보통 정원 하면 산속 혹은 평지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인데, 정원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 역시 매우 운치 있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됐다.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가 있었고, 더 늦었다가는 생폴을 방문하는데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이정표로 삼았던 건물을 찾아 다시 버스를 타고 니스로 향했다.
다음으로 들를 곳은 생 폴이라는 곳이었다. 나중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확한 명칭은 생 폴 드 방스였다. 직역하면 방스의 생폴. 프로방스 지방의 생 폴이라는 이름 같았다. 모나코에서의 하루가 너무 길어서였는지 예상한 시간보다 더욱 늦은 시간에 생폴에 도착했다.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어스름이 만연한 시간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저걸 과연 도시라 불러야 할지, 마을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됐다. 행정상으로는 도시라고 되어 있지만 겉으로만 보면 중세 시대의 마을이 혼자서 시간을 간직한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월의 떼가 묻지 않은, 중세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치 유럽의 기사도와 관련된 영화에서 공성전을 치를 때 나오는 배경에 설렘 한가득 안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에 들어갈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산은 없었다. 비를 맞는다는 사실이 조금은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막상 내 상황을 생각해보니 상당히 고무되는 일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중세 유럽의 성 안에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성 안은 무서울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비수기라 그런 건지, 아니면 여기 사람들의 하루는 다른 곳보다 일찍 마무리되는 건지, 거리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상점과 다른 건물들의 불도 거의 다 꺼져 있었다. 마치 버려진 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큰 대로변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통해 성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이 미궁 속에서 분명 길을 잃을 것임이 분명했다.
생 폴의 거리를 걷다 보니 느낀 건데, 이곳에는 유난히 예술품들을 전시해놓은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이곳은 예술가들의 마을이라고 불린다고도 한다. 그 말이 확 와 닿을 정도로, 이 마을 자체가 거대한 예술품들의 전시회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오히려 그래서 중세 시대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지 않았나 싶다. 내 상상 속에서는 이미 수염 덥수룩한 고독한 예술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며칠을 묵으며 글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어두운 성. 단어의 느낌만 보면 상당히 무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내가 생 폴에서 느낀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럽을 다니며 딱 두 번. 죽음의 기운을 느낀 공간들이 있었다. 그곳들의 특징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생 폴 역시 이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곳이었지만, 그 둘에 속하지는 않았다. 하나는 앞서 소개한 산 토리니의 레드 비치, 또 하나는 앞으로 소개할 영국의 세븐 시스터즈 힐이었다.
생 폴은 왜 그러지 아니했나? 나도 모르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초저녁이어서 그런지, 내 머릿속의 생 폴은 항상 어스름이 내려앉은 환상적인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멀리서 이 성을 바라본다면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든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어둡고, 사람의 발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그곳이었지만, 혼자라서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경건한 느낌을 준다.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그대로 지켜온 이 성에 대한 경외감일까? 그제야 이 성이 갖는 분위기가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성스러움이었다. 다 죽어가는 마을이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성스러운 느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성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이 도시의 이름이 '생 폴(Saint Paul)'이라는 것을.
이 분위기를 직접 느끼는 것 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나마 유사한 경험을 떠올려본다. 위대한 위인들의 묘소가 한 곳에 안치되어 있는 곳에 들어간 기분이다. 선하고 위대한 가치를 위해 삶을 살아온 자들이 마지막으로 안식을 취하는 신비한 공간. 그 속에 있으면 후대의 사람으로서 비장하기도 하면서 묘한 기분이 든다. 생 폴은 딱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는 곳이었다. 성을 떠나는 순간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이 사라져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곳.
당연히 성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환상 같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을 나올 때쯤의 나는 이제 더 이상 비 따위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런 심적 상태에 돌입해있었다. 성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여태 돌아다녔던 다른 아름다운 도시들보다도, 오히려 이곳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쨍쨍한 시간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간에, 그 틈에 섞여서 이곳을 만끽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니스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내 긴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런던이었다. 아련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해변가로 가서 밤바다를 바라봤다. 낮에는 푸르름으로 하나가 된 하늘과 바다는, 이제는 검은색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끝없는 어둠,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빛나는 해변가의 작은 빛무리 들을 보며 니스에서의 기억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