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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Nov 10. 2020

지중해를 머금은 남쪽 해안

#6. 니스 2014

 니스를 여행지로 정한 이유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중해 도시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어서일 뿐, 딱히 다른 도시들을 조사해보고 결정한 건 아니었다. 여행의 막바지 기도 했고, 파리에서의 긴 일정이 분명 고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휴양에 의의를 두고 잡은 장소였다. 나중에야 다른 사람들이 니스를 다녀온 것을 보며, 내가 정말 니스의 반도 못 즐겼구나라는 걸 깨달았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




지중해의 지평선


 정오가 지나서야 니스에 도착했기에 얼른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곧바로 해안가로 나왔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간간히 보이는 야자수들 때문인지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숙소를 최대한 해안가 근처에 있는 민박으로 잡아서 그런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바닷가로 나올 수 있었다.


나를 반겨주는 니스의 해안가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푸른 바다를 본 적이 있나 싶다. 이스탄불의 금각만, 산토리니의 바닷가 역시 매혹적이었지만, 푸르름을 기준으로 두고 본다면 니스의 압승이었다. 만약 인간의 힘으로 쌓아 올린 건물들만 아니었다면,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모호한 바닷가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바다였다.


이렇게 티끌 하나 없는 지평선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확실히 아름다운 자연은 그 어떤 인공물보다도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진 찍을 때 고려해야 할 밝기와 각도에 무관하게, 니스의 바다는 어디에서 어떻게 찍어도 시원스러운 풍경을 담아낼 수 있었다. 


 바다라는 곳은 참 신기하다.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한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는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속이 뻥 뚫리기도 하고,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고, 생각이 맑아지기도 한다. 이건 비단 니스의 바다뿐만이 아니라 모든 바다의 특성일 것이다. 단지 유난히 아름답기에 그 특성이 조금 더 할 뿐이다.


동화 속 바닷가 마을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며 걸었다. 아마 그때의 생각들은 역시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무의식을 꺼내서 감춰진 기억들을 들춰볼 수 있다면 난 어떤 기억들을 찾아볼 것인가? 아마 여행 다니면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떠올렸던 생각들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잡음도 없고, 현실의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떠올려진 날것의 생각들. 지금은 그런 생각들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한다.


펼쳐진 해안가가 끝나는 지점


 계속 걷다 보니 탁 트인 해안가가 끝나면서 다시 도시적인 분위기의 풍경이 돌아왔다. 도시적이라고 해봤자, 인조적인 구조물들이 있다 뿐이지 여전히 시원한 해양 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작품인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배경이 떠올랐다. 딱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니스가 분명 그 공간의 모티프가 됐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터닝 포인트에서 바라본 해안가


항구 냄새가 물씬 나는 시내


 시원한 바닷바람과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질릴 수가 없는 조합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이 유럽 여행 당시 나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정확히는 스마트폰이 먹통이 되어버린 상황). 그랬기에 종이 지도로만 길을 찾아야 했고, 지도 없이 모르는 곳에 나선다는 건 방황과 시간 낭비의 위험성을 동반했다. 그러나 긴 여정을 통해 그 방황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가 없다고 길을 잃는 것은 더 이상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용감하게 지도 없이 니스의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아크로폴리스 컨벤션 센터


 수많은 건물들을 보면서 상상하고 오해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어떤 건물은 누가 봐도 호텔처럼 생겼는데 평범한 아파트이기도 했고, 백화점처럼 생겼는데 컨벤션 센터이기도 했다. 만약 지도가 있었다면 이런 망상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사람 붐비는 시내에서 괴상한 망상들을 하며 걷는 사이,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


 니스는 곳곳에 이정표가 될만한 구조물이 많은 곳이었다. 덕분에 지도 없이 시내를 배회해도 다시 왔던 길로 돌아오는 것이 매우 수월했다. 니스의 해안가가 끝나고 시내가 시작되는 터닝 포인트로 돌아올 때쯤, 멋들어지게 깔린 붉은 노을이 나를 반겼다. 이때의 노을은 이전 글인 이스탄불에서부터 얘기한 유럽의 5대 노을 중 하나에 꼽히기도 한다. 


니스의 붉은 노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을을 보기 위해 바닷가 근처에 몰려있었다. 아마 다들 시내에서 볼 일을 다 보고 하루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아마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로 하루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부러워졌다. 지친 일상을 보내다가 바닷가로 나와 황혼에 물든 지중해를 바라보는 것. 이만큼 하루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어째 유럽 여행에 와서 현지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사는 서울에도 아름다운 노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 다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노을 역시 아름답다. 주관적으로는 유럽의 노을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우열을 가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두 아름답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광경을 자주 마주치고는 했다. 그럴 때면 오늘도 서울에서의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를 마쳤다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곤 했다. 어떻게 보면 하루의 마무리를 알려주는 스위치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일부러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게 나와 여기 니스의 사람들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부러워할 게 뭐가 있을까. 아름다운 노을은 항상 그 시간에 약속이라도 하듯 우리를 반겨준다. 단지 우리가 찾아가지 않기에 보지 못할 뿐이다. 어쩌면 여기만큼 아름답지 못한 그 노을을 탓하는 것보다, 찾아가지 않는 내 탓을 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싶다. 하루를 예쁘게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있기에 이 사람들도 해안가로 모인 것이다. 찾는 자에게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니스의 노을에서 서울의 노을을 떠올리다


 정신적으로 충만해지니 다른 쪽에서 빈곤함을 호소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근처 맛집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지만, 여행지의 매력 중 하나가 아무 곳이나 골라 들어가 현지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맛까지 좋다면 금상첨화 일터. 다행히 이날의 나는 운이 좋았다.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것이다.


오징어 스테이크 & 니스의 행복


 너무 배가 고파서 감당하지 못할 양의 음식을 시켰다. 머무르는 짧은 시간 동안 지중해가 담긴 음식을 최대한 많이 먹고 싶었던 마음도 한몫했다. 해산물이라고는 한국식 해산물 밖에 못 먹어봤기 때문에 유럽에서 하는 지중해 요리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산토리니에서 먹은 갓 잡은 물고기로 만들어준 피시 앤 칩스 같은 맛을 기대하며 시킨 음식들은 대만족이었다. 심지어 절대 못 먹을 것 같던 양을 순조롭게 해치웠다. 여행만 가면 위장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까?


슬슬 줄어드는 인파들


사람 한 명 없지만 꾸준히 솟아오르는 분수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내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벌써 12월 초에 접어들었으니 해가 빨리 지나보다. 지나치게 많이 먹었기에 조금 걸으면서 소화를 시키고 숙소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시내를 걷다가 옆에 공원 같은 곳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홀리듯 들어섰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분수에 눈이 갔다. 보통 이런 시간대에는 작동을 중지하는 게 보통인데, 사람 없는 쓸쓸한 공간에서도 분수는 리듬에 맞춰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찾아서 음악을 들었다. 그 상태로 분수를 바라보니, 마치 나만을 위한 음악 분수가 작동되는 느낌이었다. 쓸쓸한 놀이동산이란 이런 기분일까. 원래라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용감한 어린아이들이 분수 사이에서 몸을 적시며 놀고 있을 터였다. 상상하는 순간 그 장면들이 환상처럼 지금의 시야에 오버랩됐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에버랜드와 롯데월드가 이런 분위기일까. 나도 모를 쓸쓸함을 대리로 느끼고서는, 혼자서 가슴이 먹먹해진 상태로 몇십 분을 더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대로변의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 때쯤, 내 발걸음 역시 숙소로 향했다.




 사실 이 날은 매우 신기한 경험을 한 날이다.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던 몰몬교 신자를 4년 뒤 회기역의 길거리에서 마주친 것이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혹시나 해서 니스에 간 적이 있냐고 물으니 2014년에 니스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만난 청년이 그 청년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는 게 운명적이기도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쉬려고 정한 여행지에서 생각보다 많이 걸었던 하루였다. 하지만 확실히, 조금이라도 많이 보는 것은 절대로 손해가 아니었다. 후회는 없었다. 또한, 어딘가를 찾아 나서는 것보다 하릴없이 걸을 때 더욱 깊은 생각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 기도 했다. 이것이 여행의 완급조절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내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계획을 짤 때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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